[사설] 재정운용, 이대로는 안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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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나라 살림이 점점 헤쳐나오기 힘든 늪으로 빠져드는 양상이다. 형편은 자꾸 어려워지는데 그나마 살림도 제대로 꾸리지 못하는 서툰 주부처럼 재정운용의 효율성.안정성이 갈수록 악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올 들어 경기가 수직강하를 시작하면서 세금이 제대로 걷히지 않을 것이라는 점은 이미 예견된 일이다. 9월 말까지 걷힌 세금(국세기준)은 67조7천억원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2조2천억원 가량 부족하다.

경기는 갈수록 나빠지고 있어 이대로 가면 연말까지 정부가 설정한 세금징수 목표액(88조5천억원)을 채울 수 있을지도 의문스러운 실정이다.

내년은 더욱 걱정이다.내년 예산을 쓰려면 세금을 올해보다 6조원 가량 더 많은 94조원이나 거둬야 하지만 징세여건은 오히려 나빠질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덩치가 큰 법인세.소득세는 올해 줄어든 소득에 대한 세금을 내년에 걷기 때문에 세수(稅收)확보에 어려움이 클 것이 분명하다. 선거가 있는 해에 과거처럼 무리하게 세금을 긁어들일 수도 없을 것이므로 이래저래 세수 차질은 불가피할 전망이다.

반면 재정에 대한 수요는 점점 커지고 있다. 이미 두차례 추경예산을 짰듯 테러전쟁의 진전과정에서 언제 추가적인 재정 수요가 발생할지 모른다. 이미 예산지원을 확대해 달라거나 세금을 깎아달라는 요구가 쇄도하고 있다.

이런 어려운 여건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우선 정부가 재정운용의 효율성을 최대한 끌어올려야 한다. 갑자기 경기가 돌아서지 않는 한 다른 방법이 없다.

문제는 재정운용의 효율성이 오히려 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논리적 근거나 경제성이 부족한 재정지출이 있는가 하면 배정된 예산도 제대로 집행하지 못하는 비효율도 드러난다. 대표적인 예가 현재 전국의 학교를 공사판으로 만들고 있는 교실 증설공사다.

'교육여건 개선사업'이라는 이름으로 내년 초까지 6개월여 만에 6천여개의 교실을 무슨 군사작전하듯 짓는 데 5천억원 이상의 예산을 쏟아붓고 있다. 학급당 학생수를 줄인다는 교육부의 명분은 좋지만 우선순위나 시기.효율성 면에서 정부 내에서조차 논란이 빚어진 사업이다.

정부가 산하 기금.공기업 예산을 합쳐 올해 사업성 예산으로 책정한 1백25조원 가운데 지난 15일까지 90조원만을 집행해 진도율이 72%에 그쳤다는 집계 역시 재정운용의 효율성을 의심케 하는 것이다.

제대로 집행했다면 이미 9월 말까지 진도율이 75%를 넘어섰어야 했다.

사업성 예산은 재정이 경기를 부추기는 수단이므로 이런 집계는 정부가 말만 앞세울 뿐 경기조절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특정 분야에는 펑펑 쓰면서 막상 써야 할 예산은 제대로 쓰지 못하는 비효율을 바로잡지 못하면 머지않아 재정에 큰 구멍만 뚫린 채 경기 조절기능을 잃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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