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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끊긴 미국…'우편제국' 흔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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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워싱턴의 내셔널 프레스 빌딩은 세계와 미국이 만나는 정보의 광장이다.백악관에서 두 블록 떨어진 이 곳에는 중앙일보를 비롯해 세계 신문·방송·통신사 특파원 사무실이 모여있다.

특파원들은 수많은 우편물을 받는다.인권·환경침해 고발장,각종 성명,책·논문,세미나·기자회견·발표회 초청장 등 갖가지 종류가 특파원들을 찾아 프레스 빌딩으로 쏟아져 들어온다.

그러나 빌딩의 우편함은 사흘째 텅 비어 있다.워싱턴을 관할하는 브렌트우드 우편물 집배송센터의 직원 두명이 탄저병으로 사망한 다음날부터다.

이보다 앞서 의회의 우편물 중단은 10일이 넘고 있다.의회에서는 지난 15일 탄저균 편지가 처음 발견됐으며 약 30명이 탄저균 양성반응을 보이고 있다.

우편물 분류기에서 탄저균 포자가 발견되면서 백악관 전용 우편물 취급소도 일시 폐쇄됐다.1천1백여명이 근무하는 뉴저지주 해밀턴시 우체국도 탄저균이 발견되면서 기능이 부분적으로 마비됐다.

미군은 사상 처음으로 장병들에게 보내는 연말연시 위문편지를 받지 않겠다고 밝혔다.탄저균 불안 때문이다.아프가니스탄을 공격하는 전장에 나가 있는 수병(水兵)과 특수부대원 등은 편지로 본토의 크리스마스 정(情)을 느끼는 재미를 잃을 판이다.

사상 유례 없는 탄저균 테러 공포로 ‘우편 제국’ 미국이 흔들리고 있다.언제 어느 우체국에서 균이 다시 나올지 모른다는 불안감으로 79만7천명의 우정공사 직원들이 떨고 있다.존 포터 우정공사총재는 “뉴욕에서 소방관과 경찰관이 희생된 데 이어 이제는 우편 종사자들이 전쟁의 전면에 서 있다”고 사태를 요약했다.

전자메일 사용이 늘고 있지만 미국은 여전히 세계 최대의 ‘우편물 왕국’이다.미국은 국가를 세우기 전에 우편 시스템부터 먼저 만들었다.독립 1년전인 1775년 대륙의회는 초대 우정국장에 벤자민 프랭클린을 임명했다.우편은 정보·이념을 나르며 건국에 기여했다.

미국의 우편물은 하루 6억통이 넘는다.카드·편지로만 따지만 세계 우편물의 46%를 차지한다.주고 받는 각종 사신과 문서·카드·엽서 등을 통해 미국인들은 정을 나누고 정보를 주고 받고 업무를 처리해 왔다.

날로 위력이 더해가는 전화·인터넷과 함께 우편 시스템은 미국의 3대 커뮤니케이션 중추 수단이다.디지털시대에 아날로그 경제를 대표하며 건재하고 있다.국내총생산(GDP)의 8∼9%에 해당하는 각종 산업이 여전히 우편제도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미국인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우편제도는 살가운 생활의 한 부분이다.개인주택 앞에는 으레 편지함이 서 있다.퇴근하는 아빠나 엄마는 편지함부터 열어본다.미국인은 우편함을 열고 닫으며 인생을 살아간다.1·2차대전에 참전한 아들과 남편의 편지도 이곳에 들어 있었고 즐거운 바겐세일 초대장과 괴로운 신용카드 청구서도 다 이곳으로 모인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왔는지 알 수 없는 탄저균 테러의 공격으로 ‘편지의 나라’가 흔들리고 있다.미국인들은 안심하고 편지를 열어볼 수 있는 날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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