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천 년 전 아시아서 북미로 간 종족의 귀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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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날아온 스티븐 르블랑 박사(67·사진)는 “이건 역사적 사건”이라고 약간 흥분된 어조로 말문을 열었다.

북미대륙 토착 인디언들의 토기를 연구하는 ‘밈브레스 재단’의 대표이자 하버드 대학교 피바디 박물관의 유물수집 담당인 르블랑 박사는 5일 기자와 만나 “수천 년 시공을 잇는 전설이 이뤄졌다”고 표현했다.

르블랑 박사 일행은 전날 경기도문화재단(대표 권영빈)에 선사시대 미국 대륙의 모골론 문명이 남긴 ‘밈브레스(Mimbres) 토기’ 45점을 기증하고 난 참이었다.

아시아 최초로 경기도가 소장하게 된 이 토기들을 만든 사람들은 수천 년 전 아시아에서 북미대륙으로 옮겨간 종족의 후손들로 이는 일종의 ‘귀향’이라는 것이 르블랑 박사의 설명이다.

“제가 연구한 바로는 기하학적 디자인이 아름다운 이 채색토기는 10~20명쯤 되는 여성 손에서 제작된 것으로 보입니다. 일본이나 중국 쪽에서도 이 토기들을 소장하고 싶어 했지만 우리만큼 이 유물을 소중히 보존하고 제대로 연구해 줄 곳은 경기문화재연구원과 경기도자박물관 만한 곳이 없다는 판단이 서 한국을 선택했습니다.”

도쿄와 상하이 두 도시가 이 유물을 받고 싶다며 경기도와 경합을 벌였다는 후문인다.

이 과정에서 강력한 후원군 역할을 한 이가 ‘빛의 예술가’로 알려진 제임스 터렐(67)이다. 최근 제주도 서귀포에 ‘스카이 스페이스’라는 신작을 설치한 터렐은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르블랑 박사와 함께 자란 고교 동창으로 ‘네가 몸처럼 아끼는 유물이라면 한국에 주라’고 조언했다는 것이다.

“경기문화재연구원에 와 보고 친구의 말이 옳다는 걸 알았어요. 우리 재단 연구실보다 훨씬 크고 좋은 환경에서 열정적인 인재들이 열심히 연구하고 있더군요. 여기에 맡기고 가면 안심할 수 있겠습니다. 예전에는 박물관들끼리 연구에 필요한 유물을 서로 교환하는 전통이 있었는데 지금은 사라져 아쉬었던 차라 이번 사례가 더 흔쾌합니다.”

밈브레스 토기는 화석에서 발견된 뼈나 치아처럼 인간의 미토콘드리아 DNA를 추출해서 고대 인류를 연구할 수 있는 유물로 최근 고고학계에서 중요성을 인정받고 있다. 고대 인류가 씹다 뱉은 음식물 등에 남아있는 치아의 성분 등을 토기에서 뽑아내 연구하는 이 최신 학문의 선구자가 르블랑 박사다. 그는 또 현존하는 최고의 밈브레스 토기와 문화 권위자로 꼽힌다.

“우리 박물관 홈페이지(www.peabody.harvard.edu)에 접속하시면 지난 30년 동안 축적한, 1만 장에 달하는 사진자료를 볼 수 있습니다. 앞으로 한국과 교류차원에서 밈브레스 토기의 복원과 전시, 도록 발간 등을 해나갈 예정입니다. 든든한 동반자를 만나 이번 첫 아시아 여행길이 아주 행복했어요.”

그는 “미국 외에 전세계에서 밈브레스 토기를 가장 대량으로 소장하게 된 한국이 앞으로 이 토기를 세상에 널리 알리는데 큰 구실을 해달라”고 부탁했다.

글=정재숙 선임기자, 사진=강정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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