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김경원 칼럼

할 말은 하는 외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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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지금은 과거와 달리 '미국에 할 말은 한다'고 한다. 사실은 과거에도 '할 말'은 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이 듣기 싫어하는 말을 서슴지 않고 했던 대통령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리고 박정희 대통령도 카터 대통령에게 인권 문제, 주한미군 문제 등에 대해 할 말은 했다. 박 대통령은 카터 대통령이 크게 화가 날 정도로 강하게 자신의 생각을 설명했던 것을 기억한다. 따라서 미국에 할 말은 하는 것은 결코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우리나라는 초대 대통령부터 할 말은 하고 살아왔다.

*** 이승만 대통령 때부터 할 말 했다

문제는 '할 말은 한다''안 한다'가 아니라 '무엇을 어떻게 말할 것인가' 하는 데 있다. 그리고 말을 했을 때 결과도 문제다.

가령 노무현 대통령의 로스앤젤레스 연설은 '할 말'을 한 것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고 '안할 말'을 했다고 비판하는 사람도 있다. 노 대통령의 연설 내용이 미국의 생각과 다르기 때문에 공개적으로 말을 하면 한.미 관계에 나쁜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걱정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말의 내용에 따라서는 미국과 생각이 다른 경우에도 '할 말은 하는 것'이 더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문제는 말의 내용에 있다.

노 대통령의 연설이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이유는 노 대통령이 북한의 입장에 서서 세상을 북한의 눈으로 보고 북한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다고 한 말에 있다고 본다. 만일 노 대통령이 대통령이 아니고 하나의 민간인 전문가라고 하면 북한을 이해하기 위해 북한의 입장에 들어가 보는 상상력은 좋은 지성적 도구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대통령이 직접 북한의 입장에 서는 것은 너무도 위험부담이 크다. 더욱이 북한의 잘못된 주장에 동의하는 경우에는 상당히 심각한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북한은 핵과 미사일을 '자신을 지키기 위한 억제수단'이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노 대통령은 일리가 있다고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북한 핵무기가 '억제수단'이 되기 위해서는 북한이 먼저 핵 공격을 받은 뒤에도 제2차 공격을 가할 수 있다는 인식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하다. 때문에 북한 핵무기를 억지력으로 보는 것은 타당성이 없다.

또한 노 대통령은 북한은 자신의 핵무기로는 '어떤 공격적 행위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을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는데, 이도 생각해 보면 북한은 핵무기를 방위적 목적보다 공격적 행위에 사용하는 편이 더욱 용이할 수 있다. 바로 이와 같은 핵무기의 성격 때문에 북한 핵은 우리에게 위협이 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노 대통령은 '북한은 핵무기를 포기할 것'이라고 단정적으로 선언하고 있다. 북한은 자신의 '안전이 보장되고 개혁과 개방이 성공할 수 있다는 희망이 보이면 핵무기는 포기할 것'이라고 자신있게 예언하고 있다. 그러면서 미국은 북한을 믿으라고 권고한다. '믿지 못하면 대화할 수 없기'때문이라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믿지 못하는 사람을 상대로 대화하고 대화의 결과를 놓고 믿을 수 있는지 없는지를 시험해 보는 것을 상식으로 생각한다.

*** 너무 단정적이고 자신있게 예언

노 대통령은 미국이 북한에 압박을 가하거나 군사적 위협을 하지 말라고 충고하고 대화만이 유일한 수단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물론 미국의 딜레마는 북한에 대해 모든 위협적인 가능성을 제외하고 나면 대화와 협상이 설득력을 잃게 된다는 점이다. 대화와 위협은 대안이 아니다. 위협은 협상의 성공을 위해 오히려 필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다.

결국 LA 연설은 '할 말'을 했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게 아니라 그 내용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다. 할 말을 하는 것은 좋지만, 잘못 말하면 그 결과가 문제가 된다. LA연설의 결과가 바로 그런 것이 아닌가 한다.

앞으로 노 대통령의 대북인식이 공허한 환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실제로 북한이 노 대통령이 말한 대로 핵을 포기하는 결정을 내려야 한다. 만일 북한이 핵 포기를 계속 거부하면 LA 연설의 주인공은 괴로울 수밖에 없다.

김경원 고려대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