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지식사회에 묻는다] 4. 공론의 규율은 있는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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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말은 마음 속의 것을 밖으로 표현한다. 표현되는 것은 내 마음의 뜻이기도 하고, 마음에 맺힌 응어리이기도 하다. 그러나 대체로 말의 뜻이란 외부 세계의 사실과 관련해 발생한다.

과학의 언어는 외부 세계와의 관계가 가장 밀접한 언어의 예다. 과학에서 외부 세계의 사실은 가장 중요한 준거점이 된다. 물론 여기에서 사실이란 어떤 관점에서 선택된 사실을 가리킨다.

사실을 어떤 의도에서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의 사실됨을 더욱 확인하려는 의도가 사실을 선택하게 한다. 사실이 늘 수정과 대체를 향해 열려 있고 나의 의견이 다른 사람이 의심하는 의견에 열려 있어야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사실의 선택에서 중요한 기준의 하나는 일관된 논리다.과학은 사실의 세계를 말하되 그것을 그 나름의 체계로 파악하려 하기 때문이다.

또 일관성은 역설적으로 사실의 사실됨을 검증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물론 이 논리나 체계성도 수정과 대체를 향해 열려 있어야 한다. 사실과 논리의 상호작용 속에서 드러나는 것이 과학의 진리다.

정치와 사회를 말할 때에도 이러한 과학의 절차에 비슷한 것이 해당되는 것일까. 인문과학이나 사회과학은 과학적 엄밀성을 표방하기 어려운 학문 분야다.

현실의 장(場)에서 과학이나 학문적 절차는 더욱 존중되기 어렵다. 그러나 거기에도 기준과 기율이 없을 수 없다. 사회와 정치를 말하는 것은 내 속뜻이나 응어리에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공존의 공간으로서의 세계를 말하는 것이다.

물론 이 세계란 보기에 따라 다른 것일 수 있다. 정치사회의 논의에는 우리가 원하는 미래세계에 대한 그림이 깔려 있다. 이것은 더욱 여러가지로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론 다르면 다를수록 그것은 적극적으로 사실적 근거가 있는 것으로 분석되고 설명될 필요가 있다.

요즘 매체에서 읽는 많은 논쟁의 언어는 사실이나, 논리 또는 일반적으로 세계에 대한 관련이 희박한 경우가 많은 것으로 생각된다. 많은 언어들이 욕하기, 몰아붙이기, 편 가르기에 동원되는 것이다. 주의를 끌고보자는 상업주의 심리가 그것을 비판하는 언어에도 스며든다. 표현적 성격의 언어가 오늘의 주류를 이룬다. 어떤 언어는 심리적 발산에 도움이 된다.

물론 심리적인 응어리, 흥분이나 울분이 전혀 외부의 사실에 관계가 없는 것은 아니다. 흥분은 흥분의 원인이 있고 울분에는 울분의 원인이 있다.

특히 편 가르기의 언어는 상황판단에 관련이 있다. 어떤 사람들이 보기에는 합리적 설득으로 사회의 현상을 바로잡을 단계는 지나간 것으로 보이는 것일 게다.

이 관점에서 필요한 것은 전열의 정비다. 그러나 참으로 전열의 정비를 목적으로 하는 것일까.

요즘의 편 가르기 언어에서는 논자와 다른 현실인식을 가진 사람은 악인으로 규정된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사람을 내 편으로 만들자는 것이 아니라 나와 다른 사람을 베어내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 논리적 결과는 나 이외에는 전부 악인이 되는 것일 게다.

사람을 가려내는 것이 주안(主眼)이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적과 악인의 술책과 동기의 폭로가 중요하다. 과거를 들춰내고 심리와 이해관계를 구성해낸다. 상황의 해명은 중요치 않다. 이론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정치의 언어가 다수의 확보를 목표로 한다면, 그것은 깊은 의미에서의 정치적 언어는 아니다.

언어가 자기 표현의 수단으로 사용되는 것을 탓할 것은 못된다. 모든 것을 공적 기율의 엄숙성으로 다루는 것은 이해와 갈등에 얽혀 있는 현실의 삶을 억제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또 표현언어는 그 나름의 창조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언어의 범람은 사회문제에 대한 합리적이고 능률적인 해결을 어렵게 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첫 피해자의 하나는 사회적 합리성의 통로로서의 공론의 장이다.

오늘날 정부 정책에 있어서의 혼미는 공론의 장의 혼미에 관계돼 있다.

기준과 기율이야 어찌됐든 오늘날 중요한 논의들은 근본적으로 정부가 추진해온 여러 정책목표들-구조조정.의료제도.교육.남북화해, 그리고 최근에는 언론들과 관련해 추진되는 목표-로 인해 촉발된 것이다.

믿어서 되는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신문에 보도되는 조사 결과를 보면 이러한 정책적 과제에 대해 다수 국민이 공감하고 있는 것은 확실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것을 떠맡고 나선 정부와 대통령에 대한 지지도는 갈수록 낮아진다. 이 모순을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 목표는 목표고, 변화에 의해 흔들리는 자기 이익은 이익이라는 면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근본 원인은 목표와 현실의 맞물림에 있다.

좋은 목표는 그 자체로서보다도 그것이 현실의 굴곡에 맞아들어가기 시작함으로써 현실 정책이 된다. 물론 그것이 주어진 현실에 몰입돼버린다면 그것은 정책이랄 것도 없는 것이 될 것이다.

오늘의 정부 정책은 사실 다분히 스스로 만들어낸 사실에 몰입돼 정책으로서의 일관성을 가지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진정한 의미의 현실에 밀착하지도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목표 제시만으로서 모든 것이 정당화된다면, 그러한 목표는 예부터 인류의 교사들이 이미 다 제시한 바 있는 것이다. 목표는 보편적 정당성을 가져야 하고 역사적 타당성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총체적 현실 속에 일관성을 확보해야 한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그것이 단순히 기획의 차원에서 그러한 것이 아니라 복잡하고 어려운 현실과의 참을성있는 대화 속에서 그렇게 돼야 한다는 것이다.

개혁은 혁명보다 어렵다는 유행어가 있다. 사회나 정치의 목표는 권력의 강제력 내지 폭력에 의해 다수 대중에게 부과될 수 있다. 이러한 말로 힘에 대한 향수를 표현하는 사람은 혁명도 개혁이 없이는 성공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생각하지 않는 것일 게다.

결국은 현실과 대화하고 그 속에서 일관성을 확보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혁명이나 개혁이나 다를 바 없다. 지속적인 미래사회의 창조에서 혁명이 개혁보다 어렵다는 것은 20세기 교훈의 하나다.

김우창 교수 (고려대.영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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