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구 없는 인생들에게 가족의 의미를 묻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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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빈집』의 아버지는 뒤뜰의 오동나무가 대갓집의 후손임을 증명한다고 허풍을 떤다. 결국 애지중지하던 오동나무를 베어 짠 관에 제 몸을 눕히는 신세가 된다. 등단 40년을 맞은 소설가 김주영은 아버지가 부재한 탓에 서로에게 상처만 주는 일그러진 가족의 초상을 그려냈다. [문학동네 제공]

『객주』 『홍어』 등 선 굵은 작품을 쓴 소설가 김주영(71)씨가 8년 만에 장편소설 『빈집』(문학동네)을 냈다. 『빈집』은 가족의 가학적인 사랑, 본질적인 고독에 대한 이야기다.

아름드리 오동나무 한 그루 말곤 볼 게 없는 초라한 집구석이 있다. 노름판을 전전하느라 형사에게 쫓기는 아버지는 제 집을 도둑 드나들 듯 흔적 없이, 드문드문 찾아온다. 어머니는 남편을 벽장에 숨겨두곤 꼭두새벽에 나갔다고 둘러대는 대담한 여인이다.

형사가 “오랜만에 마누라가 기다리고 있는 집으로 돌아왔는데, 어째서 꼭두새벽에 집을 나가버리고 말았을까?”라며 의심하자 태연히 “일찍 일어나는 개가 따슨 똥을 먹는다지 않습니까”라 되묻는다. 그녀는 남편에 대한 불만과 애증을 딸 어진을 구박하는 데 몽땅 쏟아 붓는다. 게다가 객지로 떠도는 남편을 찾아 다니느라 집을 비우기 일쑤다. 어진은 빈집과 다름없는 집을 홀로 지킨다. 사랑하지 않았던 건 아니다. 어머니에겐 어머니대로, 아버지에겐 아버지대로, 그들만의 일그러진 방식으로 사랑했다.

하지만 밖으로만 나돌다 병에 걸려 죽은 아버지가 남긴 유산은 빚뿐이다. 어머니는 빚쟁이가 내민 차용증을 낚아채 꿀꺽 삼켜버린다. 빚쟁이가 “아니, 염소도 아닌…… 그걸 먹어버리면 어떻게 됩니까?”라며 울상을 짓자 이렇게 받아 친다. “똥 되겠지요.”

결국 어머니는 한둘이 아닌 빚쟁이들을 피해 떠도는 신세가 되고, 집도 남의 손으로 넘어간다. 어진은 빚에 팔려가다시피 결혼을 하고, 거기서도 외따로 갇힌다.

어진은 마지막 희망을 찾아 배다른 언니 수진을 찾아 나선다. 아버지에겐 아들 못 낳는다는 이유로 내친 첫째 부인이 있었던 게다. 하지만 ‘바다이바구’란 횟집 주인 수진도 고독하긴 마찬가지다. 고도비만인 제 몸뚱이를 탓하며 바람 난 남편을 모른 척 눈감아주는 신세.

“남들이 뱃가죽에 낀 지방을 뺀다, 다이어트인가 다이나마이트인가 뭘 한다고 지랄발광들하고 돌아가길래 나도 엇 뜨거라 싶어서 덜 먹고 운동 많이 하고 살 뺀다고 발버둥쳐봤어. 하지만 삼사일을 잘 견디다가 삼라만상이 잠든 한밤중에 혼자 일어나 냉장고 문이 닫힐까 발등으로 가로막고 퍼질러 앉아 죽기로 작정하고 폭식을 해서 도로아미타불이 되고 말았지.”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 갑갑한 인생들. 그럼에도 걸쭉한 입담 때문에 비실비실 웃음이 나온다. 작가는 ‘작가의 말’에서 “내 안에 터질 듯이 더부룩한 탐욕이 있다. 그것이 나를 천성적인 거짓말쟁이로 만들었다”고 적었다. 이 천성적인 거짓말쟁이는, ‘행인1’ 정도의 역할을 부여 받은 등장인물의 사연 하나도 소설 한 권 나올 듯 드라마틱하게 풀어냈다. 

이경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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