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詩)가 있는 아침 ] - '화려한 유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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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이윤학(1965~) '화려한 유적' 전문

무당벌레 한 마리 바닥에 뒤집혀 있다

무당벌레는 지금, 견딜 수 없다

등 뒤에 화려한 무늬를 지고 왔는데

한 번도 보지 못했다

화려한 무늬에 쌓인 짐은

줄곧 날개가 되어 주었다

이제 짐을 부려 놓은 무당벌레의

느리고 조그만 발들

짐 속에 갇혀 발버둥치고 있다


하릴없이 바쁘기만 하고 한 것은 없어 늘 제자리인 삶. 시간에게 무수히 따귀를 맞고도 아무 저항도 못하고 주는 대로 받은 수십 년의 나이. 나도 지금 무당벌레처럼 뒤집어져 있는 것은 아닐까? 지금까지 나를 먹고 살게 해준 삶의 크고 무거운 짐에 갇힌 채 넘어져서 일어나지 못하고 바동거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힘들여 걷고 있는 이 걸음이 단단한 땅이 아니라 허공을 디디고 있는 것은 아닐까?

김기택<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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