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60년] 서울 거쳐 평양으로 (82) 1950년 10월, 국군 점령하의 평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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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11월 말에서 12월 초까지 개마고원에서 중공군에 맞서 장진호 전투를 벌였던 미군 해병 1사단이 그해 12월 13일 함흥에 전사자들을 매장한 뒤 추도식을 열고 있다. 미군 2500여 명이 전사했다. 10배나 많은 적군에 포위된 상태에서도 투혼을 잃지 않고 싸움으로써 해병대의 위대한 전통을 세운 전투로 기억된다.

그러나 적은 오래 버틸 수 없었다. 지동리에서 평양 동쪽으로 우회한 뒤 북쪽 외곽의 모란봉으로 해서 시내에 진입한 15연대의 작전으로 적은 후방을 공격당했기 때문이다. 저들은 도망치기에 바빴다. 15연대는 내가 선교리에 도착한 시간에 모란봉과 김일성 대학에 진출한 뒤 평양 시내로 진입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하루 종일 이리저리 뛰어다녀야 했다. 사단장으로서 챙길 게 많았다. 적들은 아직 평양 시내 곳곳에 남아 저항 중이었다. 대동강가에 수시로 나가 적의 저항 강도가 얼마나 센지를 알아보기에 바빴다.

오후 5시쯤이었다. 선교리에 있는 신리국민학교(초등학교)에 CP를 만들고 전황을 체크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운동장에 서 있는데 정문으로 불쑥 들어오는 차량 행렬이 있었다. 프랭크 밀번 군단장이었다. 그는 곧장 내게로 오더니 “지금부터 훈장 수여식을 거행하겠다”고 했다. 그는 이어 “백 사단장, 축하한다. 평양 입성 공격을 이끄느라고 수고 많았다. 미 정부를 대신해서 은성무공훈장을 수여한다”고 했다. 그가 내게 훈장을 직접 달아 줬다. 그는 바로 떠났다. 전쟁 통에 받은 훈장이었지만 그를 즐길 만한 여유가 없었다. 처리할 게 많았기 때문이다.

적은 우리 사단 15연대에 의해 무너지고 있었다. 총소리는 계속 강 건너로부터 이어지고 있었지만 적은 후방을 공격당함으로써 크게 교란되고 있었다. 저녁 무렵에도 계속 전황이 사단 CP로 시시각각 전해지고 있었다. 적은 점차 물러가는 추세였다.

주민들에 대한 선무(宣撫)공작을 벌였다. 삐라를 뿌리고, 주민들이 많이 사는 지역에는 전단을 붙였다. ‘국군이 평양에 왔다. 주민들은 마음 놓고 생업에 임하라’는 내용이었다. 강 건너 평양 시내에 진입한 15연대의 전황, 12연대의 공격 상황, 11연대의 진격 등이 모두 순조로웠다. 평양은 국군과 미군에 의해 질서가 잡혀지고 있었다. 밤늦게까지 그런 보고를 받고 있었다.

이제 눈을 붙여야 할 때였다. 밤이 아주 깊은 시각이었다. 사단 CP인 신리국민학교 바로 옆이 내 숙소다. 어머니와 나이 어린 우리 3남매가 함께 살던 내 집이 그곳에 아직 있었다. 당시 평양에는 이미 초가집이 거의 없었다. 일제시대 막바지에 일반 가정의 지붕은 대개가 슬레이트로 올렸다. 밤이 늦은 시각에 학교 정문을 나와 부관과 당번병을 데리고 도착했다. 집은 옛 모습 그대로였다.

주민 몇 명이 눈에 띄기에 전쟁 전까지 평양에 남아 있던 누님의 소식을 물었다. 다행히 누이는 평양 외곽으로 피란을 갔다고 했다. 다행이었다. 이 모진 전쟁에서 민간인으로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것만도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마음이 놓였다. 그리고 두 칸의 방 중에 내가 자라면서 늘 묵었던 방으로 들어섰다. 부관과 당번병이 함께 들어와 자리를 마련해 누웠다.

전투 중이라 역시 군화를 풀지 않고 잠자리에 들었다. 아주 피곤하고 힘든 하루였지만 잠을 이룰 수 없었다. 5전짜리 차표를 사서 동생과 함께 전차를 타고 대동강변으로 가 헤엄을 치고 놀던 생각들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이 전쟁은 어떻게 끝을 맺을 것인가. 김일성이 이끄는 노동당을 이 대한민국의 영토에서 몰아낼 수 있을까. 내가 오늘 들어선 평양의 의미는 무엇인가. 수많은 생각이 계속 떠올랐다. 저 옆에 누운 부관과 당번병은 이미 코를 골고 있었다.

임진강을 넘어 황해도를 거쳐 들어온 평양이다. 그 과정을 나는 세심하게 지켜봤다. 적의 저항은 미미했다. 지동리를 넘었을 때 받아 들었던 적군의 통신선에서 흘러나오던 인민군 교환대 대원의 다급한 목소리가 떠올랐다. 적이 심각하게 무너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은 대목이었다.

그렇다면 하루라도 빨리 평양을 벗어나 북으로 계속 치고 올라가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렇게 쉽게 북한군이 무너진다는 게 한편으로는 믿어지지가 않았다. 미군과 함께 국군도 이 전쟁의 승리를 낙관하는 분위기에 빠져들고 있는 시점이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나는 뭔가 개운치 않은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이 전쟁이 이대로 끝을 맺을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희망과 함께 석연치 않은 무엇인가도 내 마음속에 떠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중공군이 그대로 이 전쟁을 지켜볼 것인가, 그들은 개입할 수 있을까 등에 대한 우려였을지도 몰랐다.

평양에 들어선 우리는 사실 축제 분위기였다. 적도(敵都)를 빼앗았다는 기쁨에 충만했던 국군은 물론이고, 이역만리(異域萬里)의 전쟁터에서 하루라도 빨리 싸움을 끝내고 고향에 돌아가고 싶었던 미군도 마찬가지였다. 미군은 특히 별다른 반격 없이 평양까지 치고 올라온 것을 두고 자신감에 가득 차 있었다. 이 전쟁은 곧 끝날 수 있는 전쟁이고, 우리의 승리는 눈앞에 와 있다는 생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마음 한 구석으로는 끊임없이 걱정이 찾아들고 있었다. 꼭 들어맞는 어떤 이유가 있어서는 아니었다. 그저 ‘좋은 일일수록 불길함이 생길 수 있다’는 식의 ‘호사다마(好事多魔)’에 대한 우려 때문이기도 했다. 그냥 뭔가가 이상했다. 평양에서의 첫 밤, 오랜만에 돌아온 고향이지만 이런저런 생각으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내일은 다시 북진해야 한다. 그 점이 중요했다. 어느덧 나는 엷은 잠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백선엽 장군
정리=유광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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