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을 열며] 무슬림이 칼을 드는 경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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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비행기가 뉴욕 세계무역센터의 허리를 가로 질러 꽂히는 장면을 볼 때마다 '자이눌' 이란 이름의 무슬림(이슬람교도)친구가 생각난다.

비행기를 조종해 거대한 건물의 벽면으로 돌진하면서 최후의 순간까지 목표물을 정확히 응시했을 무슬림 테러리스트의 눈동자. 나는 6년 전 자이눌에게서 바로 그 눈동자를 보았다.

자이눌은 방글라데시의 중견 언론인. 영국의 항구도시 카디프에서 석달간 계속된 '언론인 연수과정' 에서 그를 만났다. 그는 바짝 마르고 자그마한 체구의 40대 지식인이다. 유난히 큰 그의 검은 눈동자는 매우 깊고, 늘 촉촉했다. 어찌 보면 우울하고 불안정해 보였고, 또 어찌 보면 착하고 슬퍼 보였다.

수업을 마치고 기숙사로 돌아온 어느날 오후 4시쯤이었다. 독방을 쓰는 8명의 학생이 같은 주방을 사용했기에 한꺼번에 주방에 몰려 음료수 등을 마시며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 때 자이눌이 작은 수건을 들고 나타났다. 그는 조용히 싱크대로 가 수도꼭지에서 흘러나오는 물에 손과 발, 그리고 머리를 씻었다. 그 모습을 보던 브라질 출신, 거구의 백인친구가 말렸다.

"제발 그만 해라. 여러 사람이 같이 쓰는 싱크대 아니냐. 다들 요리를 하는 곳에서 발을 씻고 머리를 감으면 안된다. " 자이눌이 자신의 몸을 닦는 것은 매일 다섯번씩 메카를 향해 절을 하는 예배의 첫번째 절차이기 때문이다.

무슬림은 경건한 예배를 올리기 전에 옷밖으로 나와 있는 사지(四肢)와 머리를 반드시 씻는다. 평소 공동 화장실에서 몸을 씻던 자이눌이 이날은 화장실이 붐비자 주방에서 '우두(몸씻기)' 를 한 것이다. 자이눌이 사정을 설명했다. 브라질 친구에겐 통하지 않았다.

"아무리 종교의식이라지만, 그건 너의 종교이지 우리 모두의 종교는 아니지 않으냐. 화장실에서 기다렸다가 씻어도 되는데, 굳이 왜 여기서 씻느냐. 당장 그만두어라. "

설명을 하려는 자이눌과 "납득 못할 설명" 이라며 짜증을 내는 브라질 친구 간에 언쟁이 이어졌다. 브라질 친구가 자이눌을 막 잡아 끌어내려는 순간이었다. 겁 먹고 당황한 눈동자의 자이눌이 그의 손을 뿌리치고는 식기 옆에 놓여 있던 식칼을 꺼내 들었다.

"모욕이다(insulting)" .

짧은 한마디를 내뱉으며 자이눌이 칼을 들고 브라질 친구를 노려보았다. 바로 그 눈동자였다. 평소의 착하고 우울해 보이던 눈동자엔 증오와 살의가 번득였다. 검고 깊은 모양은 예전과 다름없는데, 눈동자에서 시퍼런 냉기가 뿜어나오는 듯했다.

혼비백산한 브라질 친구가 소리를 지르며 도망쳐 불상사는 없었다. 자이눌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몸을 닦고는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늦은 오후 예배를 올렸다. 이후 다른 백인친구들까지 자이눌을 보면 슬금슬금 피했다.

나도 무섭긴 했지만 조심스럽게 자이눌에게 물었다. 왜 그런 돌출행동을 했느냐고. 그는 "이슬람은 평화를 사랑하는(peace-loving)종교" 임을 거듭 강조했다.

'이슬람' 이 곧 '평화' 란 뜻이며, 동시에 '순종' 이란 뜻이라고도 했다. 결국 하느님(알라)에 대한 순종 속에서 평화를 얻는다는 의미로 이해했다. 하루 다섯번의 예배는 하느님에 대한 순종이며, 이를 가로막는 행위는 자신의 종교와 신에 대한 모욕이라는 설명이다.

이슬람은 단순한 종교가 아니다. 정치에서부터 자질구레한 일상에 이르기까지 무슬림의 일거수일투족을 지배하는 규율이다.

따라서 자이눌에게 '우두' 는 위생차원의 사소한 문제가 아니라 칼을 들고 수호해야 할 성역과 같다. 그러나 기독교도인 브라질 친구에게 '우두' 는 그저 비위생적인, 몰상식한 행위에 불과했다.

그런 일을 만류하는 사람에게 칼을 들이대는 행위는 광기(狂氣)로 해석될 수밖에 없다. 이같은 서로에 대한 무지(無知), 또는 무시(無視)가 쌓이고 자란 것이 곧 '문명의 충돌' 아니겠는가.

오병상 문화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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