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그때 오늘

민의 를 저버린 권력의 말로 … 이기붕 일가의 비극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3면

왼쪽부터 이강석, 영부인 프란체스카, 이승만, 이기붕, 박마리아, 이강욱. 제1공화국 시기에 ‘민족의 해’ 이승만에 버금가는 권력자는 ‘민족의 달’로 불린 이기붕(李起鵬, 1896~1960)이었다.

4·19혁명 직후 대학생 231명은 가장 싫어하는 인물이 누구인지를 묻는 설문에 이기붕, 자유당 지도층, 경찰, 부정축재자, 이승만, 정부 관료 순으로 답했다. 이기붕이 1위, 이승만은 5위였다. 또한 시위 참여 이유에 대해서도 응답자의 84.5%가 자유당에, 그리고 11.5%가 이승만에 대한 반대를 꼽았다. 4·19혁명은 자유당 과두(寡頭)지배체제에 대한 저항이었으며, 그 중심에 이기붕이 있었다.

그는 1923년 미국 아이오와주 데이버대학 졸업 후 1934년까지 ‘3·1신보’의 편집을 맡으면서 이승만과 인연을 맺었다. 1945년 10월 이승만의 환국(還國) 이후 그는 서무담당 비서, 대통령비서실장, 서울시장, 국방부 장관 등을 역임하면서 권력의 사다리를 하나하나 올라갔다. “파벌작편(派閥作偏)하여 반당(反黨)행위를 하는 족청(族靑)계를 축출하고 당을 정화 재건하라.” 1953년 9월 이승만의 지시에 따라 이범석이 이끄는 민족청년당 계열 숙청을 주도한 그는 당권을 손아귀에 넣었다. 이듬해 국회의장과 자유당 중앙위원회 의장자리에 오르며 명실상부한 제2인자가 됐다.

그때 미국은 “경제 개발에 더 적극적이고 대미 관계에서 덜 독자적이며(less independent) 대일 관계에서 덜 시끄럽고(less obstreperous), 대북 관계에서 광적인 과격함을 보이지 않는다”고 판단한 이기붕을 이승만의 후계자로 지목했었다. 1956년 선거에서 낙선의 쓴잔을 들었지만, 이승만과 미국 둘 다 그의 손을 계속 잡아주었다. 1957년 3월 이승만은 이기붕의 장남 강석을 양자로 입적했다. 보수양당제의 확립을 바란 미국도 이기붕과 조병옥이 이끄는 자유당 온건파와 민주당 구파를 묶어 여당으로 만들고, 민주당 신파를 야당으로 만드는 것이 이승만 이후의 가장 바람직한 정치체제라고 판단했다. 내각제를 정강정책으로 택하고 있던 민주당의 구파와 공감대를 이룬 자유당 온건파의 내각제 개헌 노력은 자유당 강경파의 반발에 부딪쳐 무산됐다. 1960년 2월 15일 민주당 대통령 후보 조병옥이 급서(急逝)한 후 4대 정·부통령 선거도 4년 전과 마찬가지로 반쪽 선거가 됐다. 그때 자유당 강경파는 당 조직은 물론 경찰과 공무원을 동원한 부정선거를 자행함으로써 파멸을 자초했다. 4·19혁명이 터지자 미국은 이기붕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다. 1960년 4월 28일 아침. 이강석은 치사량의 수면제를 복용해 자살한 가족들의 시신을 향해 한 발씩 총탄을 쏜 뒤 자신의 가슴과 관자놀이에 두 발의 탄환을 쏘았다. 경무대 본관 36호 관사에서 자살로 생을 마감한 이기붕 일가의 비극은 민의를 저버린 권력의 말로(末路)를 보여주는 권력 무상의 증표로 우리 기억 속에 남아 있다.

허동현 경희대 학부대학장·한국근현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