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테러, 보복과 응징의 한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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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피의 화요일' 의 악몽에서 깨어난 세계의 이목이 미국의 대응에 쏠리고 있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미국의 심장부를 겨냥한 이번 테러를 '전쟁행위' 로 규정하고, 전쟁 수준의 보복방침을 천명했다. 테러에 가담한 범죄자들은 물론이고 이들에게 은신처를 제공한 나라에 대해서도 강력한 보복을 다짐했다.

도널드 럼즈펠드 국방장관은 사전경고 없는 군사작전 돌입 방침을 밝혔다. 미 국민의 94%가 군사적 조치를 지지하고, 86%가 전쟁이 나더라도 보복을 해야 한다는 의견이다. 여론의 압도적 지지 속에 곧 전쟁이 터질 것 같은 분위기다.

희생자수조차 파악하기 어려울 정도로 막대한 피해를 본 미국으로서 테러의 주모자와 배후세력을 색출해 응징하는 건 당연하다. 세계 여론도 이를 지지하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번 테러가 '얼굴없는 테러' 라는 점이다.

누구를 상대로 보복을 할지, 어느 나라를 상대로 전쟁을 벌일지 아직은 막막하다. 수사력을 총동원해 미 당국이 범인색출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는 만큼 언젠가는 밝혀지겠지만 앞으로 얼마나 더 시간이 걸릴지 알 수 없다.

미국의 보복과 응징이 정당성을 확보하고 세계 여론의 공감을 얻기 위해서는 범행 전모의 철저한 규명이 우선돼야 한다. 예단은 금물이다. 명명백백한 증거를 통해 베일 뒤에 숨은 테러범들의 얼굴이 백일하에 드러나도록 해야 한다.

섣부른 보복은 반미(反美)감정만 부추기면서 보복의 악순환을 초래할 뿐이다. 세계는 미국의 보복과 응징이 또 하나의 국제전쟁으로 확대될 가능성을 불안한 눈으로 지켜보고 있다.

테러에 무참히 희생된 미국시민의 생명이 소중한 만큼 테러범들이 숨어 있을지 모르는 나라의 무고한 시민의 목숨도 소중하다.

'이에는 이' 로 맞서 섣불리 분노를 쏟아냄으로써 새로운 증오와 피를 불러오는 결과야말로 테러범들이 진정으로 바라는 바일지 모른다. "일시적 안전을 위해 자유를 침해하는 자는 자유와 안전 두 가지를 다 잃게 된다" 는 벤저민 프랭클린의 충고를 미국은 기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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