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테러 대전] "이제 미국에 온 꿈 이루나 했더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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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이제야 미국에 온 꿈을 이루는가 했는데…. "

테러범들에 의해 1백10층짜리 세계무역센터 건물 2개동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미국 뉴욕 맨해튼에서 퀸스보로 다리를 건너 플러싱에 있는 이현준(33)씨 집은 13일 새벽(현지시간)까지도 불이 켜져 있었다.

지난 11일 세계무역센터 86층 미 국세청(IRS) 사무실로 출근한 뒤 실종된 李씨의 소식을 확인하기 위해 사흘째 맨해튼 일대의 병원과 거리를 헤매고 다닌 부인 김진희(29)씨 등 가족들은 몸이 파김치가 된 상태였지만 잠을 이루지 못했다.

"미국 주류사회에 편입했다고 기뻐하더니…" 라고 어머니 김송자(58)씨가 울먹이자 아버지 이동호(63)씨는 "그 앤…" 이라며 말끝을 흐렸다.

부인 金씨는 멍한 눈빛으로 허공만 쳐다봤다. 모두들 李씨의 실종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 모습이었다.

李씨 가족이 뉴욕에 정착한 건 1985년. 아버지 李씨가 81년 홀로 미국으로 건너와 닥치는 대로 막노동을 하며 얻은 영주권으로 가족들을 초청했다.

당시 고교생이던 李씨는 낯선 언어와 환경 속에서 90년 퀸스대에 입학, 아메리칸 드림을 키워 갔다. 낮에는 아르바이트를, 밤에는 공부를 하는 주경야독 생활을 했고, 주말에는 아버지가 운영하는 중고품 상점에 나가 일을 거들었다. 고학을 하면서도 그는 한인지구 성당에서 성가대 활동과 기타 연주를 즐기는 쾌활한 청년이었다.

고생 끝에 대학을 7년 만에 졸업하고 미국 공인회계사(AICPA) 자격증을 땄다. 한인타운 회계사 사무실에서 보조회계사로 일한 지 3년. 지난 3월 부모 소개로 만난 金씨와 결혼했고, 두달 후 국세청에 취직했다.

"이민 20년 만에 최고의 날" 이라며 가족잔치를 벌인 것이 불과 넉달 전의 일이다.

"우리의 꿈이 이렇게 끝날 수는 없습니다. 어딘가에서 가족들을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

날이 밝으면 구조현장을 찾아가겠다며 남편의 사진을 어루만지는 金씨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뉴욕=홍주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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