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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손과 입술로 느낀다, 나만의 찻사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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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21면

글=이정봉 기자
사진=권혁재 전문기자 shotgun@joongang.co.kr>

선비처럼 차 한잔 마시고 새재를 걷고

찻사발 축제가 열리는 행사장은 문경새재 도립공원 인근에 마련됐다. 조선 시대 선비들이 과거를 보기 위해 드나들었던 길목이다. 행사장 안에는 드라마 ‘대왕 세종’을 찍었던 한옥 세트장이 있다. 그 안에서 차를 즐길 수도 있다. 워낙 산골이라 건물이 산의 품에 잠긴다. 차 한잔 마시고 새재를 거닐면 조선 시대의 선비로 돌아온 듯하다. 굳이 말차가 아닌 엽차를 마셔도 커다란 찻사발은 꽤나 어울린다.

문경 조선요 김영식 선생이 빚은 이도다완에 말차를 담았다. 찻사발이 오래 되면 찻물이 들어 노릇한 빛깔을 띠게 된다.

이번 축제에 전시되는 찻사발은 대개 이도다완이다. 이 찻사발들은 임진왜란 전후 100년간 만들어졌다 순식간에 사라졌다. 질박한 듯 자유로운 형태에 워낙 수가 적은 이 찻사발은 일본에서 귀빈 대우를 받는다. 당시 일본에서는 잘 만든 찻사발 하나를 성과 바꿨다는 기록이 있다. ‘다완의 극치’라는 찬사를 받는 ‘기자에몬 이도(喜左衛門 井戶)’는 일본의 국보로 지정됐다. 이런 ‘명품 찻사발’이 수백 년의 세월을 돌아 1960년대부터 문경에서 다시 살아났다. 문경에서 활동해 온 김정옥 선생의 아버지 고(故) 김교수 선생과 천한봉(77) 선생이 이를 복원하면서부터다.

문경에는 가장 오래된 가마가 있다

지은 지 167년 된 조선시대 망댕이 가마.

문경까지 갔다면 꼭 한 번 들러볼 곳이 있다. 문경시 관음리에 있는 지은 지 167년(헌종 9년) 된 가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됐다. ‘망댕이’를 쌓아 올려 만들었다. 조선 시대에 지은 망댕이 가마로는 유일하게 남아 있다. 이 가마는 2006년 민속자료로 지정되면서 지금은 사용되지 않는다. 하지만 문경의 찻사발은 모두 이 가마를 모태로, 여전히 망댕이 가마를 직접 짓고 도자기를 구워 낸다. 망댕이는 어른 허벅지 굵기쯤 되는 말뚝 모양의 구운 흙덩이다. 일종의 벽돌인 셈이다. 망댕이를 높이 쌓아 올리면 뾰족한 끝부분들이 점차 안쪽으로 모여들면서 천장이 아치형을 이룬다. 힘이 분산돼 1000도가 넘는 온도에도 천장이 견딘다. 망댕이 가마는 가마 5개가 이어져 누에 모양을 하고 있다. 가마 사이에는 불길이 지나는 살창이 있으며 전체적으로 12도 정도 기울어져 불이 잘 흐른다.

발로 차서 물레를 돌리고 불도 장작으로 땐다. 문경에서 활동하고 있는 중요무형문화재 사기장 김정옥(70) 선생은 “이렇게 해야 도자기에 조선 도공의 혼이 깃든다”고 말했다.

좋은 찻사발 어떻게 고를까

찻사발엔 인간이 미처 다듬지 못하는 자연의 손도장이 찍혔다. 망댕이 가마의 불길이 지나가며 만든 그릇 표면의 문양은 구름 같기도 하고 바람 같기도 하다. 유약이 녹아 흘러내린 자국은 마치 꽃이 피어난 듯하다. 찻사발은 찻물을 담으면서 색을 빼닮기도 한다. 사고서 후회하지 않는 찻사발을 고르려면 눈으로만 골라서는 안 된다. 차는 눈이 아니라 손과 입으로 즐기는 것. 두 손으로 찻사발을 포개 쥐고 사발의 변죽에 입술을 갖다대 봐야 한다. 이때의 두께와 촉감이 자신에게 딱 맞는 것을 고르는 것이 좋다. 찻사발을 만드는 공예가들이 형태·빛깔과 함께 가장 신경 쓰는 것도 잡고 닿을 때의 촉감이다.

1 김영식 선생이 만든 어소환(御所丸) 사발. 붉은 얼룩(철화)은 철 성분이 불길에 닿아 변한 것이다. 2 중요무형문화재 사기장 김정옥 선생이 만든 계룡산 사발. 다산과 정진을 의미하는 ‘눈 뜬 물고기’가 그려졌다. 3 김정옥 선생의 평다완. 불 때문에 분홍색 얼룩(요변)이 생긴다. 4 천한봉 선생이 만든 김해 사발. 고양이가 할퀸 것 같은 빗살무늬와 4쪽으로 나뉜 굽(할굽)이 특징이다.

5만원이면 꽤 괜찮은 것 살 수 있어

한옥 세트장 안에는 문경시내 14개, 전국 8개 요장의 도예가들이 부스를 차려놓고 저마다 만든 찻사발을 전시한다. 미국·독일·일본 등 세계 28개국에서 31명의 작가도 손수 만든 찻사발을 내놓는다. 몇 만원에서 수백만원까지 가격도 다양하다. 시중 가격보다 20~30% 싸게 팔기 때문에 5만원 정도면 꽤 괜찮은 찻사발을 살 수 있다.

축제에서는 수백 년 전의 도공이 돼 찻사발을 빚고 굽는 체험 행사도 진행된다. 망댕이를 직접 손으로 차곡차곡 쌓아 올려 볼 수 있다. 저절로 돌아가는 전기물레 위에서 찻사발을 빚어볼 수도 있다. 직접 빚은 찻사발을 초벌로 구워 물고기·포도 등 전통 문양을 그리는 행사도 열린다. 문경대 도예과 학생들이 이 과정을 돕기 때문에 어렵지 않다.


TIP 일본 최고의 찻사발, 이도다완

이도(井戶)다완은 찻사발의 종류를 일컫는 용어다. 이도 산주로(井戶三十郞)라는 일본인이 조선에서 가져갔다는 설, 경상도 하동 새미골이 생산지라는 설 등이 있으나 아직 정확히 밝혀진 바 없다. 차를 사랑하는 일본인들은 “평생 한번 만져만 봐도 여한이 없다”고 할 정도로 찻사발 중의 최고로 여긴다. 그만큼 조건도 까다롭다. 사발 바닥에 차 찌꺼기가 고일 수 있도록 옴폭 들어가야 하고, 굽이 약간 높은 듯 마디가 져 있어야 하고, 굽 안팎에 매화껍데기처럼 우툴두툴한 자국이 나타나야 하는 등의 조건이 갖춰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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