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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인터뷰] 6월에 활동 끝나는 진실화해위 이영조 위원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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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어느 나라나 아픈 과거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걸 정리하는 방법도 다양한데요, 진실화해위를 설치하는 것도 그런 이유겠지요.

“전쟁이나 내전을 겪고 식민 통치나 권위주의 정권의 지배를 받으면 인권침해가 발생합니다. 그런 과거사를 정리하는 방법은 통상 세 가지입니다. 미국의 경우 노예제, 인디언 인권침해 같은 게 있는데 사법적인 절차를 통해 구제받도록 하고 있습니다. 또 학술연구만 하고 끝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진실위원회는 그 중간쯤에 있는 거죠. 사법 구제는 어렵고, 그렇다고 학술연구에 맡기기엔 무책임하니 진실위원회를 설치하는 겁니다. 70여 나라가 하고 있습니다.”

-위원회가 지향하는 정신은 뭔가요.

“진실위원회는 일정한 타협을 전제로 합니다. 완벽한 정의가 아닙니다. 완벽한 정의를 위해서라면 관련자들을 다 처벌하고 사법적인 심판으로 가야죠. 하지만 법률적·정치적 이유로, 혹은 시간이 너무 흘러 그렇게 할 수는 없고 그렇다고 그냥 놔둘 수도 없으니 타협하는 거죠. 완벽은 아니지만 상당한 정도의 진실과 정의를 확보해 통합과 화해로 가자는 정신인 겁니다.”

-위원회를 만든 나라 가운데 성공과 실패 사례를 든다면 어떤 게 있습니까.

“뭘 기준으로 하느냐에 따라 다르죠. 진실과 정의를 추구했다는 모양새를 갖추기 위해 만든 경우도 있으니까요. 넬슨 만델라의 남아프리카공화국이 세계적인 모델처럼 돼 있지만 밝혀낸 진실은 별로 없어요. 남아공은 가해자가 증언하면 사면해 주는 형식이었습니다. 따라서 인종차별이 있었다는 사실 자체는 확인됐지만 개개인의 피해를 밝히는 데는 성공적이지 못했어요. 그런 측면에선 한국이 성공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한국이 더 구체적이고 성공적이었던 이유가 뭡니까.

“우리는 친일이든 항일이든 그후의 권위주의 인권침해든 문헌자료가 남아 있는 경우가 많아요. 말하기 조심스럽지만 독재를 해도 남미처럼 법을 깡그리 무시한 독재는 아니었다는 거예요. 그런 나라들은 그냥 납치해서 비행기로 싣고 가 바다에 던지니까 증거가 없죠. 한데 우리는 (독재를 위한) 법을 만들고 포고령 내고 했지만 형식적이라도 사법 절차는 거친 경우가 많아요. 수사와 재판기록이 남아 있는 거죠. 그게 큰 차이입니다.”

-한국은 인권침해가 상대적으로 덜했다는 말처럼 들립니다.

“피해 당사자들을 생각하면 그렇게 말할 순 없죠. 어떤 군대를 갔던 간에 다 힘들었다고 하잖아요. 아무튼 법을 거치거나 이용한 권위주의였기 때문에 문헌자료가 많이 남아 있다는 건 분명합니다.”

-전쟁 때 일 은 자료가 없을 텐데요.

“그래도 남아 있는 게 있어요. 조선시대부터 왕조실록, 비변사 일기, 승정원 일기 같은 게 전해져 왔는데 그런 기록 문화도 영향이 있는 것 같아요.”

-진실화해위가 내린 수많은 결정이 다 진실하고 옳았다고 장담할 수 있습니까.

“위원들의 의견이 일치하지 않으면 투표를 합니다. 결국 투표에 의한 진실, 다수결에 의한 진실인 거죠. 투표 당시 위원회를 구성한 위원들의 지배적인 의견을 반영할 뿐이고 오류 가능성이 있는 게 사실입니다.”

-위원회 결정이 100% 진실과 정의는 아니라는 거군요.

“그렇게 말할 자신이 없습니다. 진실화해위의 판단은 사법적인 판단과 학술적 연구의 중간 영역 정도로만 받아들이면 좋겠어요. 저희 결정이 사법적 판단보다 더 위에 있는 초법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니까 문제가 생기는 것 같아요.”

-하지만 법원이 진실화해위 결정을 근거로 판결을 번복하는 게 많지 않습니까.

“법원이 위원회의 판단을 높이 산다는 점에서 자부심도 있지만 사실 걱정도 됩니다. 법원이 따로 조사하지 않고 우리 결정을 인용해 굉장히 빠른 속도로 판단을 내리시는데요, 저희가 그럴 정도로 평가받을 수 있는지 불안하거든요. 자칫 이상한 게 튀어나오면 위원회의 신뢰가 한꺼번에 무너지지 않을까 부담됩니다.”

-진실화해위 조사관 중에는 해당 사건 당사자 격인 분들도 있다는데 공정성과 객관성에 문제는 없습니까.

“그런 비판과 우려가 있죠. 조사총괄과를 만들어 보고서를 누가 썼는지 검토하게 합니다만 이런 장치가 만들어지기 이전에 조사된 부분은 완전히 자신하긴 어렵습니다.”

-조사관이 100명이 넘는데 어떤 분들입니까. 조사는 전문 영역에 해당하는데 훈련은 받습니까.

“조사국 직원만 140~150명입니다. 시민단체 등에서 일하던 분들도 있고 파견 공무원도 일부 있고요. 조사 매뉴얼이 있고 자체적인 교육도 받습니다.”

-4년 동안 1만 건이 넘는 조사를 했는데 졸속이란 비판을 받지 않을까요.

“신청 건수가 1만1000건이었고 각하된 것 빼고 조사는 7000건이 좀 안 됩니다. 전체 신청 중 6·25전쟁 때 벌어진 게 90%쯤 되는데 여러 건을 묶어서 처리하니까 그리 많은 건 아닙니다. 졸속은 아니라고 봅니다.”

-6·25 때 발생한 인권침해라는 게 인민군과 국군, 미군에 의한 겁니까.

“인민군과 빨치산에 의한 것들도 있지만 국군과 미군에게 받은 피해신고가 더 많습니다. 과거에는 그런 걸 신고하기가 쉽지는 않았을 테니까요. 전쟁 때는 이래저래 억울한 희생이 많죠.”

-2005년 노무현 정부에서 위원회가 만들어질 때 한나라당 추천으로 위원이 되셨죠. 그때 분위기와 정서는 지금과는 사뭇 달랐을 것 같은데요.

“그렇죠. 제 의견과 다른 경우도 꽤 있었죠. 물론 받아들여지진 않았지만.”

-위원이 15분인데 의견이 다르면 표결을 해 전체 의견으로 나가죠. 과거의 결정 중에서 지금 결정하면 달라질 게 있는 것 아닙니까.

“아마 있을 겁니다. 말씀드렸듯이 위원회의 결정은 100% 진실이나 정의라기보다는 그 결정이 내려질 당시 위원들 다수의 판단일 뿐입니다.”

-제가 일선 기자 때 K씨 유서대필 사건을 취재했는데 20여 년 만에 진실화해위 결정에 따라 법원에서 다시 뒤집히는 걸 봤습니다. 핵심 쟁점은 여전히 의문이던데요.

“위원회가 성급한 결정을 내렸다고 생각해요. 다른 견해와 주장이 나왔으니 새로운 조사의 출발점일 뿐인데 그걸 근거로 과거를 뒤집어 버렸으니까요. 그 사건은 재판도 유신이나 5공 때가 아니라 민주화 시기 이후에 진행됐는데…. 아무튼 몇몇 건에 대해선 저는 위원회 결정과 다른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진실화해위가 올해로 끝나는데 소회를 말씀해주시죠.

“누가 어떤 동기와 정치적 목적에서 시작했든 간에 한국은 어두웠던 역사들을 거의 다 들췄습니다. 세계 어느 나라도 못한 거죠. 우리의 국격을 평가받는 데 있어 내세울 수 있는 대목입니다. 과거사 정리는 우리의 자산일 수 있고 이런 소프트파워를 외교에도 활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브라질이 요새 과거사 정리작업을 하는데 룰라 대통령에게 우리 경험을 전해주겠다고 하면 그런 게 외교죠.”

김종혁 문화·스포츠 에디터
정선언 기자, 사진=오종택 기자



노무현 정부 때 설립 … 7000건 조사
일부 결정엔 “정치적 편향” 반발도

진실화해위는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진실화해위)는 노무현 정부 때인 2005년 12월 설립됐다.

위원장을 포함해 4명의 상임위원과 11명의 비상임위원들이 전원위원회를 열어 특정 사건의 인권침해 여부 등을 결정한다. 전원위에 앞서 민족독립규명위원회·집단희생규명위원회·인권침해규명위원회 등 3개의 소위원회에서 1차 결정이 이뤄진다. 위원들은 대통령과 국회의 여당과 야당, 대법원장이 각각 지명한다. 임기는 2년이다.

지금까지 진실화해위에 접수된 사건은 총 1만1000여 건이고 이 중 79%가 처리됐다. 신청사건의 90%는 6·25전쟁 당시 발생한 민간인 학살 사건이다. 조사과정에서 전국 13곳에서 1600여 구의 유해가 발굴되기도 했다. 4년 넘는 활동 기간 동안 진실화해위는 ‘강기훈 유서 대필 의혹 사건’ ‘보도연맹 사건’ ‘아람회 사건’ 등 한국 근현대사에 기록된 굵직한 사건들에 대해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일부 결정에 대해선 “위원들의 정치적 편향성이 반영됐다”는 반발이 나오기도 했다.

진실화해위는 결정을 내리면서 관련 대책을 국가에 권고한다. 지난해 12월까지 155건의 권고가 나와 이 중 149건이 이행됐거나 추진 중이다. 위원회가 재심을 권고한 47건의 사건 중 20건은 무죄가 확정됐다.  

정선언 기자

◆이영조(54) 위원장=경북 성주 출신. 대구 계성고, 서울대 정치학과 졸. 하버드대학에서 『문명의 충돌』로 유명한 새뮤얼 헌팅턴 교수로부터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바른사회를위한시민회의’ 창립 멤버로 초대 사무총장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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