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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추억] 작곡가 고 춘봉 김희조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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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8.15 해방 전에는 일본이나 미국에 유학하지 않으면 음악을 제대로 전공할 수 없었다. 더구나 예술가를 천시하는 그릇된 풍조 때문에 음악가에의 길은 험난하기만 했다.

지난 4일 81세로 타계한 작곡가 춘봉(春峯) 김희조(金熙祚)옹. 고인은 서울에서 상업학교를 나와 음악대학 문턱에도 가보지 않았지만 한국 음악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취미로 시작한 음악이 직업으로 굳어진 경우였지만 그는 '음악은 곧 삶 자체' 라는 좌우명을 굳게 실천한 '전업 작곡가' 였다. 개척자답게 양악(洋樂)과 국악, 경음악과 클래식, 연주회용 음악과 실용음악을 넘나들었다. '크로스오버' 를 일찍이 실천한 것이다.

고인은 조광은행 남대문지점에서 은행원으로 근무할 때 몇 푼 안되는 월급을 쪼개 레슨비를 마련했다. 그 돈으로 안병소씨에게서 바이올린, 김순남씨에게서 작곡을 배웠다. 이게 그가 받은 음악교육의 전부다.

해방 후엔 서울시향의 전신인 고려교향악단에서 비올라 주자로 3년간 활동했으며, 한국전쟁 때는 육군군악대를 이끌고 평양에서 시가행진을 벌이기도 했다. 군악대장을 그만둔 뒤에도 그는 '밀양 아리랑 행진곡' 등 우리 민요를 주제로 한 행진곡을 작곡했다. 국빈 환영 의장행사에서 국악 취타대를 내세우는 아이디어를 내기도 했다.

바이올린으로 음악에 입문한 그가 국악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963년 국악예고에 음악교사로 출강하면서부터.

그는 성금련.지영희씨 등 당시 쟁쟁한 민속악의 명인들과 교류했고 서울시국악관현악단에서는 편곡담당을 거쳐 2대 지휘자를 지냈다. 또 국립가무단(현 서울시뮤지컬단)의 초대 지휘자, KBS관현악단 상임지휘자(58~72년)로도 활동했다. 경희대와 서울예대 교수를 지냈으며 91년 옥관문화훈장을 받았다.

국악예고 재학 중 고인에게서 작곡을 배운 박범훈(朴範薰)중앙대 부총장은 "선생님은 후학들에게 '서양음악을 흉내내지 말고 한국적인 곡을 쓰라' 고 당부하시곤 했다" 고 회고했다.

고인의 차남으로 지휘자인 김덕기(金德基)서울대 음대 교수는 "선친은 '예술가' 가 아니라 '직업 음악가' 라고 말씀하시는 등 늘 겸손하셨다" 며 "생전에 오페라 한 편을 쓰는 게 소원이셨던 어른의 영전에 뮤지컬 '대춘향전' 을 오페라로 개작, 상연해 바치고 싶다" 며 아쉬워했다.

고인은 무대음악과 영화음악에도 관심이 많았다. 그는 '대춘향전' (68년) '시집가는 날' (74년) '양반전' (86년) '고향의 민들레' (90년) 등의 뮤지컬, '심청전' (76년) '춘향전' (77년) '처용' (81년) 등의 무용음악, '고종황제와 의사 안중근' (59년) '아 백범 김구 선생' (60년) '메밀꽃 필 무렵' (67년) '난중일기' (77년) 등의 영화음악 등 토속정서가 듬뿍 담긴 작품을 썼다.

88년에는 서울올림픽 개.폐회식 음악인 '태평성대' 를 맡았다. 하지만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것은 82년부터 99년까지 17년에 걸쳐 완성한 국악 관현악을 위한 합주곡 11편. 국악 관현악단들이 앞다퉈 연주하는 '국악 교향곡' 이다.

유족은 은기(恩基.연세대 원주의대 교수)씨 등 2남1녀. 빈소는 삼성서울병원이며 발인은 8일 오전 8시. 02-3410-6919.

이장직 음악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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