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입 연중 수시모집 혼돈의 고3교실] 下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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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서울대 공대 대학원생 金모(28)씨는 3개월째 주말이면 대구행 비행기를 탄다.

토 ·일요일 이틀간 현지 B학원에 등록한 고 3수강생들을 상대로 ‘심층 면접 강의’를 하기 위해서다.

이 학원엔 金씨 등 서울대 대학원생 10명을 비롯,과학기술원 ·포항공대 등에서 ‘공수’된 명문대 대학원 재학 강사 20여명이 입시준비생 60여명을 지도한다.

金씨가 교습비로 챙기는 돈만도 한 주일에 60만∼80만원.학원측은 항공료·숙박비와 별도의 ‘수고비’까지 건넨다.

B학원 관계자는 “명문대생들은 해당 대학과 면접에 나선 교수들의 정보를 가장 잘 알고 있다고 소문나 심층면접강사로 최고의 인기다.‘돈은 얼마든지 줄테니 사람만 잡아달라’는 문의가 잇따른다”고 말했다.

연중 상시모집 체제 도입 첫해인 올해 일선 고교의 준비부족으로 공교육 혼란현상이 심화하고 있는 틈을 '사교육 만능주의' 가 파고들고 있다.

실습과외.심층면접 과외 등 신종(新種)사교육은 활기를 잃은 고3교실과는 대조적으로 시장을 급속도로 넓혀가고 있어 가뜩이나 사교육비 부담이 심한 학부모들의 고통을 가중시키고 있다.

청주고 임근수(林根洙.38)교사는 "고교에서 수시모집 취지를 살릴 수 있는 여건이 마련돼 있지 않은 상태에서 대학마다 수시자격을 높게 설정해 고교교육은 오히려 위축되고 있다" 고 지적했다.

◇ 신종.고액과외 기승=서울 S대 자연대의 한 실험실엔 지난 7, 8월 주말마다 고교생 3~4명이 들락거렸다.

이 대학 석.박사과정생들이 짬을 내 자연계열 지망생들을 상대로 '실험과외' 를 했던 것. '실험과외' 의 가격은 시간당 20만원.

각종 경시대회.심층면접에서 교수들의 질문이 까다로워지면서 수험생들의 수요에 따라 급증한 현장실습 과외 중 하나다.

입시 전문가들은 "올해는 심층면접.경시대회 등을 대비해 실습 위주의 과외나 최고 1백만원 이상의 신종.틈새 과외가 판을 치는 한 해" 라고 진단한다.

대학원생.학원강사들이 주로 하는 자기 소개서 작성이나 추천서 대필(代筆) 역시 강사의 비중에 따라 건당 10만~30만원을 호가한다.

국어 담당 학원강사 洪모씨는 "강남 일대에선 서울의 명문대 현직 교수가 수백만원을 받고 직접 추천서 대필사업에 뛰어든 것으로 알고 있다" 고 전했다.

서울J학원 관계자는 "돈은 좀 들겠지만 학부모들의 닦달이 만만찮아 심층면접 강좌를 맡아줄 현직 교수들을 물색 중이며 이미 몇몇 교수들과 접촉 중" 이라고 말했다.

이밖에도 특기자 전형 지망학생을 노린 수백만원대의 골프과외를 비롯, 제2외국어 속성 과외와 연기(演技)과외 등도 전에 없이 극성을 부렸다.

그렇다고 해서 국.영.수 등 주요 과목의 과외가 수그러든 것도 아니다.

고3 학부모 朴모(46.여.서울 송파구)씨는 "특기나 심층면접 등 전형방법이 달라져도 결국 승부는 국.영.수에서 갈리는 것 아니냐" 며 "올해는 일반과목 과외에 특기과외.면접과외 등 사교육비가 재작년 큰 아이의 대학입시 때보다 두배 이상 든다" 고 불평했다.

◇ '떴다방' 식 과외, 멍드는 수험생=지난달 31일 오후 원서접수가 한창인 서울 모 대학 접수창구 앞.

입시철에만 프리랜서식 강사들을 모아 나서는 소위 '떴다방' 식 학원 관계자들이 길거리에서 기출문제집 판매와 심층면접 과외 홍보 전단지 살포에 한창 열을 올린다.

이날 딸(18)의 원서를 제출한 학부모 李모(46.여.서울 은평구 불광동)씨는 "수능이 코 앞이라 '밑져야 본전' 이라는 심정에 전단지를 챙긴다" 고 말했다.

서울 강동구 K학원. 간판은 논술지도학원이지만 2학기 수시모집 시즌이 시작되자 '면접팀' 을 급조하고 인터넷 홈페이지까지 여는 등 심층면접 세일즈에 한창이다.

고3 딸을 둔 학부모 金모(44.여.경기도 성남시 분당구)씨는 "주변에서 비싼 돈을 주고 '떴다방' 과외에 보냈다가 부실한 강의내용에 돈과 시간만 허비했다는 얘기를 자주 듣지만 유혹을 받는 건 사실" 이라고 말했다.

◇ 제자리 걷는 공교육, 마음만 앞선 대학들=수학에 재능이 있는 서울 C고 3학년 申모군. 하지만 수학 특기를 겨냥한 수시모집 응시는 일치감치 포기했다.

申군은 "집이 어려워 과외는 생각도 못한다" 며 "그렇다고 학교수업만으로 수학경시대회나 대학의 심층면접에서 좋은 점수를 따기란 무리" 라고 말을 흐렸다.

매달 교양.논술 학원비로만 1백만원을 내는 같은 학교 許모군도 "학교 수업은 여전히 암기 위주인데 심층면접 등 사고력 측정 시험에 도움이 되겠느냐" 고 반문했다.

"대학들이 '고교교육만 제대로 받으면 충분히 답할 수 있는 문제' 라고 밝혔지만 그대로 믿은 내가 바보였어요. 심층면접에서 제시된 영어 질문지에는 교과서에 안 나온 단어들이 수두룩했어요. 게다가 응시학생 중 과외를 받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어서 완전히 속은 느낌입니다. "

지난 1학기 K대 경영학과 수시모집에 지원했다 떨어진 朴모(18.대구 A고 3년)군은 고교교육 현실과 동떨어진 수시모집 입시를 이렇게 비판했다.

서울대 김중(金中)입학전문위원은 "수준별 심화학습, 특성화 교육 도입 등으로 획일적인 평준화에 갇혀 있는 고교교육 방식을 손질하는 것이 시급하다" 고 말했다.

조민근.홍주연.강병철.남궁욱 기자

*** 어느 고3생의 과외 목록

심층면접 과외, 시사.교양 능력시험 과외, 논술 경시대회 과외, 수능 학원 수강….

대학 수시모집에 이미 여섯차례나 원서를 낸 서울 H고 3년 朴모(18.강남구 논현동)군이 지난 3월부터 받은 각종 과외의 '수강 목록' 이다.

2학년 말까지 서울 지역 상위권 대학 지원이 가능한 내신 2등급을 유지한 朴군이지만 3학년에 진학하자마자 수시모집에 지원하기 위해 일찌감치 학원과 과외 수강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朴군이 처음 매달린 것은 3월부터 시작한 심층면접 대비 학원 수강. 매주 토.일요일 이틀간 서울 대치동 K학원에서 '주말 면접 강의' 를 듣고 지불한 6개월치 수강료는 총 2백40만원.

지난 5월에 시작된 수시모집 지원 직전엔 매번 20만원을 주고 '1대1 모의 면접 과외' 도 10차례나 따로 받았다.

朴군의 같은 반 친구 鄭모(18)군도 "학원에서 자기 소개서를 봐준다는 명목으로 '지원 서류 점검비' 60만원을 받았다" 고 덧붙였다.

경시대회 대비 비용도 만만치 않았다. 국어 논술 경시대회 출전을 앞두고는 건당 50만원을 주고 유명 학원 강사에게 팩스 첨삭 및 개인지도를 여덟차례나 받았다. 결과적으로 지금까지 6개월간 들어간 과외비는 1천2백54만원으로 한달 평균 2백9만원 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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