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있는 아침] 이제하 '노을' 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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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장돌뱅이 차림을 하고 꼭 우리 아버지 같은 사람이 저어만큼 걸어가고 있어서 어릴 적 등뫼산으로 산소 가던 일과, 할아버지 상여 뒤를 따라가던 일을 연거푸 생각하며, 낯이 붉어 재개 재개 따라 언덕마루까지 와보면, 거기 고운 자주빛으로 텅 비어 있는거… 텅 비어 있는거…

- 이제하(1937~) '노을' 중

1950년대 말, 이제하씨와 나는 미대에 다녔다. 서교동.동교동은 그 때 논밭이었다. 와우산을 넘거나, 당인리로 가는 버스에 유리창 밖으로 고개를 내민 닭들과 함께 실려다녔다. 당인리 농가 닭들은 거세당한 파리넬리처럼 울었다.

와우산에 뜬 저 자줏빛 노을을 누가 이제하만큼 칠할까. 그때나 지금이나 그와 나는 세련된 것에서 벗어난 장돌뱅이 아니었던가.

이제하씨의 '노을' 후반 "억울한 누님의 슬픈 이웃의/입김이 어리어 떠도는 공중의/나도 자주빛 한덩이 말씀이 되어" 는 43년 전 무대미술이다.

김영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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