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IMF 이후 최악의 경제지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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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경제가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나빠지고 있다. 산업 생산과 투자.소비 등 실물경제 지표들이 급격히 악화하고 있는 가운데 국내외 주가는 폭락을 거듭하고 있다.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를 졸업했다고 축배를 든 것이 지난주다.

그러나 최근 발표되는 주요 경제지표들은 한국 경제가 외환 위기의 여진(餘震)에 강타당했던 1998년 이후 최악의 상황임을 가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통계청이 집계한 7월 산업활동 동향을 뜯어보면 최근 들어 가파르게 위축되고 있는 경제의 실상이 드러난다. 산업 생산은 98년 이후 최악(-5.9%)이며, 제조업 가동률(71.0%)은 29개월 만에 최저 수준까지 떨어졌다. 9개월째 뒷걸음질을 거듭하고 있는 설비 투자는 감소폭(-10.3%)이 두자릿수를 넘어섰다. 소비.수출 등 나머지 지표들도 악화일로를 걷고 있다.

금융시장이나 해외를 둘러봐도 적신호 일색이다. 한국뿐 아니라 세계 경제의 견인차 역할을 해온 미국 경제는 2분기 중에 겨우 마이너스 성장을 모면할 정도로 침체를 면치 못하고 있으며, 급기야 다우존스지수 10, 000선이 붕괴되고 나스닥지수도 1, 800선이 무너지는 등 경제 전반에 먹구름이 번지고 있다. 미국의 부진을 메워줘야 할 독일과 일본 경제마저 올들어 마이너스 성장을 면치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나라 안팎의 상황은 이미 위기 의식으로 나타나고 있다. 국책연구기관장인 강봉균(康奉均)한국개발연구원장이 지난달 30일 한 강연에서 "동아시아 경제가 경기 측면에서 외환위기 때보다 더 어려워질 수도 있다" 고 말한 것이 좋은 예다.

그는 환란(換亂)당시만 해도 이른바 닷컴 바람을 탄 미국 경제가 좋아 위기 극복의 디딤돌 역할을 했지만 지금은 70년대 1차 오일쇼크 이후 처음 겪는 세계적인 불황이어서 전망이 더욱 어둡다고 진단했다. 康원장의 이같은 진단은 폭넓은 공감을 얻고 있다.

이미 경제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3분기 성장률이 1%대로 떨어질 가능성이 거론되고 있다. 4분기에는 경기 회복이 가능할 것이라는 정부의 장담은 갈수록 힘을 잃고 있는 반면 내년 상반기에나 가야 경기가 바닥을 칠 것이라는 전망이 늘고 있다.

위기는 이처럼 눈앞에 바짝 다가섰다. "설마" 했던 사람들도 이제는 피부로 느낄 수 있을 정도다. 문제는 우리가 위기를 보고 느끼면서도 제대로 대응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위기를 앞장서서 타개해 나가야 할 정부와 정치권부터 우왕좌왕하고 있다.

지난 IMF 체제는 일단 닥친 위기 극복을 위해서는 우선 모든 경제 주체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정치적 리더십이 바로서야 한다는 교훈을 남겼다. 그러나 지금 정치권은 적과 동지조차 구별할 수 없는 혼탁한 싸움에 빠져 경제는 저만치 밀려나 있는 상황이다.

행정부 역시 방향과 자신감을 잃은 채 산적한 현안을 하나도 제대로 풀어내지 못하고 있다. 4년 전 이맘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가운데 귀중한 달러와 시간만 날렸던 기아자동차 사태를 연상시키듯 표류하고 있는 하이닉스반도체나 대우차 매각, 현대투신의 외자 유치 등이 대표적인 예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 외환 위기보다 더 치명적이고 가혹한 경제 위기를 맞을 수도 있다. 더 늦기 전에 리더십을 복원하고 위기 극복에 에너지를 결집시켜야 할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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