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 투신사들, 정부 곳간 노릇 "못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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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공적자금으로 대신 물어주는 돈이니 좀 깎아주십시오. "

"펀드 자산은 고객들의 돈입니다. 저희 맘대로 할 수 없습니다. "

지난 13일 오후 서울 명동 은행연합회. 서울보증보험이 투신에 대신 물어줘야 할 돈 가운데 6천2백억원을 깎아달라고 요청하는 재정경제부 고위 관계자는 예전과 다른 투신사들의 반응에 진땀을 흘렸다.

재경부는 이날 서울보증보험이 5조원의 공적자금을 받아도 투신에 줄 돈이 부족하니 6천2백억원을 깎아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투신사 사장들은 '사정은 딱하지만 우리도 물러설 곳이 없다' 며 거절했다. "조금도 양보를 안해주면 우리가 공적자금운영위원회에 가서 무슨 말을 하느냐" 는 하소연도 "투신은 자선사업 하는 곳이 아니다" 라는 냉담한 반응을 꺾을 수 없었다.

증시 부양이나 자금시장 안정에 단골로 동원되던 투신사들이 이제 '노(No)' 라고 말하고 있다. 정부가 가욋돈처럼 여겨 언제든지 꺼내 쓸 수 있는 비상용 지갑의 역할을 거부하고 나선 것이다.

◇ 정부 곳간 역할 못하겠다=투신권이 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은 지난 5월 하이닉스반도체의 유동성 위기가 불거지면서부터다.

투신권은 연말까지 만기를 맞는 회사채 1조4천억원 가운데 6천8백억원의 만기를 3년 연장하자는 채권은행의 제안을 거부했다.

이 갈등은 금감원 고위 관계자가 회의에 참석해 개별 투신사를 일일이 설득한 끝에 타협점을 찾았지만 투신사들이 더 이상 정부와 은행에 끌려다니지 않으리라는 신호탄이 됐다.

투신권은 이후 하이닉스반도체와 현대유화 등 잇따른 현안에 대해 만기 연장과 금리 인하 등 정부의 의중이 담긴 채권은행단의 요청을 줄곧 거부해왔다.

투신권은 또 지난 27일 서울보증보험에 대해 가압류를 신청한 뒤 28일까지 이틀 동안 정부로부터 집중적인 철회 독촉을 받았지만 다음달 20일까지 가압류를 한시 유예하는 선에서 버티고 있다.

◇ 관치(官治) 따르다간 망할 수도 있다=투신권이 그 전과 다른 모습을 보이는 것은 정부 정책에 순응해오다 투신권은 물론 자금시장 전체에도 오히려 악영향을 끼쳤다는 자기 반성 때문이다.

정부는 1989년 '12.12 증시부양 대책' 이후 증시나 자금시장이 불안할 때마다 예산에는 잡히지 않으면서 부담없이 끌어 쓸 수 있는 투신 자금을 단골로 동원해 왔지만, 시간이 지난 뒤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은 것은 없었다.

특히 대우사태 때는 환매제한 조치 이후 불과 6개월새 전체 투신 수탁고의 30%가 넘는 78조9천여억원이 빠져나가 투신의 존립 기반을 흔들기도 했다.

지난해 7월 채권시가평가가 도입된 뒤 고객들이 펀드의 부실 위험을 비교적 정확히 알 수 있게 된 점도 부실회사에 대한 투신사의 지원을 억제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한 투신사 임원은 "고객들이 투기등급에 투자하는 펀드에서도 부실 채권을 줄이라고 요구하고 있어 정부 정책을 따를 수 없게 됐다" 며 "최근 대우채 환매와 관련해 정부 정책과 무관하게 투신이 고객에게 피해를 배상해야 한다는 판결이 나온 점 또한 큰 자극이 됐다" 고 말했다.

투신업계의 주도권이 정부 주도 회사에서 순수 민간회사와 외국계로 옮겨가는 점도 투신사의 자세를 변화시키고 있다.

민간 투신사들은 최근 삼성투신운용이 20조원 이상의 수탁고를 기록하며 업계 1위로 떠오르고 은행계 투신들도 기존 투신사의 자리를 위협하는 등 급성장하고 있다. 이밖에 동원BNP.하나알리안츠.한일투신운용 등은 외국계 대주주의 엄호 아래 부실채권 비중을 줄이며 착실히 수탁고를 늘리고 있다.

증권연구원 고광수 연구위원은 "투신의 역할이 강화돼야 전체 자금시장의 선순환을 기대할 수 있다" 며 "투신이 제 목소리를 내며 고객의 신뢰를 회복하려고 애쓰는 것은 매우 바람직한 현상" 이라고 평가했다.

나현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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