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홍구 칼럼

한국 민주정치의 위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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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누가 뭐라 하든 경제가 불황에 빠져들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그러기에 경제회복과 활성화가 국가의 최우선 과제라는 데는 국민적 합의가 이루어진 지도 이미 오래다. 그러나 경제위기 극복에 골몰해 민주정치가 당면하는 위기를 가볍게 여기는 우(愚)를 범할 수 없다. 시장경제도 민주정치도 살아 숨쉬는 생명체들이다. 현대사 속에서 우리는 가벼운 증세라고 방치했다가 치명적인 중병으로 악화된 경우를 수없이 보았다.

*** 국민적 합의 마련에 거듭 실패

교과서적인 원론으로 돌아간다면 민주정치의 핵심은 누가, 누구의 뜻을 받들어, 어떤 목표를 향해, 어떤 방식으로 나라를 이끌어 가느냐에 있다. 누가 나라를 이끌어 갈 것인지를 국민적 선택으로 결정하는 공정한 선거제도의 확립은 민주정치의 기본요건이며 우리 국민은 이를 성공적으로 성취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권에도 누구의 뜻을 어떻게 받들 것인지는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특히 다수의 지지를 받지 못해 연립에 의존해야 하는 소수정권의 경우나 선거에서 지극히 근소한 차이로 승리함으로써 국민적 합의보다는 분열의 증후가 뚜렷한 상황에서 출발하는 정권의 경우에는 다수의 합의를 어떻게 만들어 가느냐 하는 어려운 과제에 직면하게 된다.

지난 10여년 한국의 민주화가 상당한 수준으로 진전되었지만 정치적으로는 불안과 불안정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역대 정권이 다수의 정치를 가능케 하는 국민적 합의를 만드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즉 국민의 지지가 가장 중요한 권력자원이라는 민주정치의 기본원리를 소홀히 한 잘못에서 비롯되고 있다. 특히 국민보다 내가 더 잘 알고 있다는 위험한 오만의 결과일 수도 있다. 결정적인 승자가 없이 끝난 선거 뒤에는 모두가 타협의 정치, 공생의 정치를 강조하지만 이를 실현해 나갈 정치기술의 미숙이 발목을 잡은 경우도 많다. 이러한 민주정치의 진통을 정확하게 진단하고 적절한 처방을 내리려면 제도적 측면과 문화적 측면으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먼저 제도적 측면에서 본다면 우리의 국가운영체제 또는 헌정질서는 뚜렷하게 강점과 한계성을 함께 보여주고 있다. 예컨대 대통령 탄핵과 수도 이전을 둘러싼 메가톤급 정치적 파탄의 위기를 질서정연하게 넘길 수 있도록 한 헌법재판소 제도는 한국 민주정치의 제도적 강점으로 평가되는 것이 마땅하다. 반면 건국 이래 오늘에 이르도록 깊이 뿌리내린 청와대 중심의 국가운영체제 또는 대통령 무책임제의 갖가지 폐단을 제거해야 하는 제도적 개혁은 아직도 해결해야 할 과제로 남아 한계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직면한 한국 민주정치의 위기는 제도적 측면보다 정치문화적 측면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우리의 정치에선 타협과 공생을 가능케 하는 인간적인 소양이나 덕목이 분열과 대결의 흥분 속에서 잊혀 가고 있다. 오랫동안 우리 민족의 전통 속에서 간직해 온 '인내'와 '겸손'이란 덕목이 바로 민주정치를 가능케 하는 기본자세임이 잊혀 가고 있는 것이다. 한번의 큰 개혁으로 세상을 바꾸기보다 수백, 수천의 작은 개혁들에 의해 국민생활의 질과 양식이 서서히, 올바르게 개선돼 나가기 위해서는 무한한 인내가 필요하다. 또한 진리는 어느 누구도 독점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상대방의 입장에도 일리(一理)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겸손 역시 매우 중요하다. 결국 우리 국민은, 특히 정치인은 인간적 차원에서의 반성을 통해 공동체 생활에 필요한 전통적 덕목을 되찾는 것이 민주정치의 위기를 극복하는 지름길이 될 것이다.

*** 정치인, 지혜로운 자가 돼야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지혜의 소중함을 잊어 가고 있다. 추상이 구체를 압도하고, 이념이 경륜을 앞지르며, 지사(志士)를 현인(賢人)보다 우러러보는 통념을 벗어난 풍조가 만연하고 있다. 어렵게 이룬 우리의 민주주의를 자칫 우민(愚民)정치로 퇴보시킬까 걱정된다. 우리 정치인들이 인내력과 겸손을 갖추고 보다 지혜로운 지도자로서 거듭나는 노력을 통해 다소라도 국민의 실망을 덜어주기 바란다.

이홍구 중앙일보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