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라파트, 아랍인 가슴에 묻히는 '행복한 투쟁가'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18면

▶ 팔레스타인 소년이 11일 요르단강 서안의 라말라 자치정부 청사에 걸린 아라파트 사진에 입을 맞추고 있다. [라말라 AP=연합]

"나는 항상 권총과 올리브 가지를 함께 가지고 다닌다. 내 손에서 올리브 가지가 떨어지지 않도록 하라." 1974년 유엔 총회에서 아라파트가 행한 연설의 일부다. 연설이 끝나고 찍은 사진에서 총 대신 평화의 상징인 올리브 가지를 높이 치켜든 모습을 볼 수 있다. 이후 아라파트는 항상 빈 권총집을 차고 다녔다. 무장투쟁에서 타협과 협상 노선으로 돌아선 그에게 권총은 필요 없었다.

93년 9월 13일 중동 각국을 떠돌던 아라파트는 미국 백악관에서 이스라엘의 이츠하크 라빈 총리와 굳은 악수를 했다. 팔레스타인 최고의 테러리스트와 아랍의 위협으로부터 이스라엘을 지킨 전쟁영웅이 손을 잡고 평화공존을 선언한 것이다.

그리고 10여년 후 2004년 11월 10일 아라파트는 그토록 갈망했던 팔레스타인 독립국가를 보지 못하고 프랑스에서 눈을 감았다. 이집트에서 태어나 팔레스타인에서 소년기를 보내고, 중동 각국에서 투쟁과 협상을 진행하고, 팔레스타인에 돌아와 자치정부를 세웠지만 결국 파리의 군병원에서 생을 마친 것이다.

그는 죽는 순간까지 '역동적(dynamic) 역사'를 만들어내고 있다고 이집트의 한 전문가는 평했다. 그를 추종하는 수억명의 아랍.이슬람 사람들은 지난 열흘간 신문과 방송에 매일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다. 산소호흡기를 달고 일주일여를 중환자실에서 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팔레스타인의 한 시인은 알자지라 방송에 나와 "그는 지난 50여년간 역대 어느 지도자보다도 큰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며 "그는 가장 행복한 투쟁가였다"고 말했다. 그리고 방송 카메라 앞에서 대성통곡했다.

<아라파트 연대기 크게보기>

아라파트는 사업가.투쟁가.평화주의자로서 각 분야에서 모두 성공을 거두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는 투쟁가로 기록될 것이다. 3년간 자치정부 청사에 갇혀 불행한 말년을 보냈지만 이 역시도 투쟁가적 명성에 보탬이 됐다. 알아라비야 방송은 특집방송을 내보내면서 "전 아랍 신문에서 지난 50년 동안 가장 많은 지면을 차지한 인물"이라며 투쟁으로 점철된 삶을 소개했다.

아라파트는 아랍인들의 사랑과 관심을 가장 많이 받아온 인물이었다. 그의 지나친 인기를 시기하는 아랍 지도자들도 많았다. 요르단의 후세인 전 국왕, 시리아의 알아사드 대통령 등이 꼽힌다. 이들은 아라파트를 자국에서 추방하는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라파트의 명성에 도전해 보았던 지도자들은 모두 실패하고 먼저 세상을 떠났다.

아랍인들은 아라파트의 역사는 영원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의 무덤은 앞으로 수백년 동안 아랍인들의 성지가 될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이미 아랍권 초등학교의 역사책에 그에 관한 역사가 올라 있다. 하지만 내년에는 더 많은 쪽수가 그에게 할애될 것이라고 이들은 말한다.

카이로=서정민 특파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