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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철호 시시각각

‘정치의 바다’에 빠진 한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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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이들의 눈에는 핏발이 서 있다. 지난해 페어링의 실패가 뼈에 사무치는 눈치다. 민경주 나로우주센터장은 “이번에는 반드시 성공시키겠다”고 했다. 더 이상 물러설 곳도 없고, 누구보다 찬밥 먹는 설움을 잘 알기 때문이다. 1차 발사 때 페어링 실험은 100회였다. 이번에는 380회나 반복 실험을 마쳤다. 사고조사위원회가 지적한 끼임 현상을 막기 위해 분리구동장치를 완전히 손질했다. 진공에서 높은 전압이 공급될 때 방전이 일어나는 오류도 바로잡았다.

이들의 남모를 고민은 따로 있다. 엉뚱할지 몰라도 발사 시점이 문제다. 발사 성패가 기상 조건에 크게 좌우되기 때문이다. 현재 전문가들이 잡고 있는 최적의 시점은 5월 말부터 6월 초. 문제는 6월 2일 지방선거가 변수다. 만에 하나 실패하면 선거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 성공해도 정치적 함수가 복잡하다. 야당들이 “우주개발까지 선거에 이용한다”며 비난할 게 뻔하다. 청와대를 중심으로 선거 이후 발사설(說)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것도 정치적 부담 때문이다.

발사를 자꾸 미루면 생돈이 빠져나간다. 러시아 기술진의 하루 체류 비용만 수천만원이 든다. 더 큰 문제는 날씨다. 지방선거 이후에는 바로 장마철이다. 지난해에는 6월 2일부터 비가 오락가락했고 바람도 거세졌다. 4일에는 13㎜가 넘는 장대비가 내렸다. 나로호 기술자들은 요즘 틈만 나면 절이나 교회를 찾는다. 그들의 소원은 두 가지다. 첫 기도는 당연히 2차 발사 성공이다. 그 다음에 이렇게 빈다. “올해 장마는 제발 늦게 찾아오도록 해 주소서….”

한명숙 전 총리의 수사도 마찬가지다. 1심에서 ‘5만 달러’ 무죄 판결로 검찰이 체면을 구긴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9억원’ 사건은 또 다르다. 제보가 들어왔고, 압수수색을 통해 환전 기록과 구체적인 전달 정황까지 확보한 마당이다. 그런데도 “선거에 영향을 미쳐선 안 된다”는 정치권 반발이 거세다. 검찰은 “정치일정을 감안하는 것이야말로 ‘정치 검찰’이 아니냐”고 각을 세우고 있다. 하지만 ‘정치 보복, 선거용 기획수사’라는 비난에 맞서기엔 자신 없는 표정이다. 정치권의 압박 속에 검찰 독립성을 상징하는 대나무 로고는 흐물흐물 녹아내리고 있다. ‘혐의가 있으면 수사하고, 죄가 있으면 벌한다’는 사법 원칙도 실종됐다.

드디어 천안함 사태까지 정치공방전에 휩쓸릴 조짐이다. 보수진영은 사태 초기에 사병(士兵)들만 집중적으로 희생되자 “악재가 터졌다”며 긴장했다. 지금은 북한 소행으로 흘러가면서 표정이 바뀌고 있다. 한나라당 일각에선 은근히 ‘북풍’까지 기대하는 눈치다. 진보진영은 정반대다. 처음에 기세를 올렸다가 지금은 속이 타들어가는 모습이 역력하다. 민주당의 한 관계자는 “내부 폭발로, 제발 북한 어뢰는 아니도록 해달라고 기도하는 심정”이라고 전했다. 46명의 젊은이가 희생된 본질은 온데간데없이 증발됐다. 지방선거를 앞두고 분주히 정치적 주판알만 퉁기고 있다.

한국의 정치는 너무 힘이 세다. 백년대계인 우주개발까지 빨아들이는 블랙홀이다. 검찰 수사와 국가안보마저 정치 프리즘을 통해 굴절되고 있다. 정치만 판치는 사회는 미개하다. 다원화 사회는 전문가 영역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한다. 우주개발은 과학자에게, 국방은 군에, 수사는 검찰에 맡기고 조용히 결과를 지켜봐야 하지 않을까. 그 다음에 판단해도 결코 늦지 않다. 우리 사회에서 전문가의 침묵이 너무 길어지고 있다. 한국이 ‘정치의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철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