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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가와티의 인도네시아] 下. 법이 부패 키운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0면

미국 국적의 제임스 볼트(56)는 인도네시아석유공사 페르타미나에 5년째 근무해온 석유채굴 전문가다. 오래 전 결혼했지만 아이가 없어 인도네시아 아이를 입양키로 했다. 그러나 볼트는 곧 입양을 포기했다.

"같은 입양절차에 각기 다른 세가지 규정이 있었다. 규정마다 '각기 다른 세개의 연령권에 대한 하부규정' 이 또 달려있었다. 때문에 끊임없이 관리들에게 시달렸고 결국 입양을 포기했다. " 볼트의 설명이다.

인도네시아 내 법과 제도의 난맥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국민협의회(MPR)에서 와히드 대통령을 탄핵하고 메가와티를 새 대통령으로 추대한 것을 둘러싸고 지금껏 법률적 공방이 계속되고 있는 것도 인도네시아 헌법(1945년 제정)자체가 대단히 모호하기 때문이다.

헌법학자인 수자티 디완도노는 "과거 수하르토 대통령은 (헌법의)모호함을 즐겼다" 고 지적하고 규정을 모호하게 만든 뒤 해석권을 독점하는 게 독재를 하기에 훨씬 유리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강력한 권위주의 정권 하에서는 헌법과 법률이 너무 명확해선 곤란하며 오히려 상대의 역공을 받을 우려도 있어 일부러 이런 모호함을 방치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인도네시아에서 폐기된 플라스틱병.쇳조각 등 재활가능한 폐품을 수집해 싱가포르로 수출하는 싱가포르인 제임스 쳉(45)은 "인도네시아에서는 공무원이 곧 규정" 이라고 말했다. 어떤 규정을 적용할지는 공무원이 결정한다. 그리고 공무원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허가에 따른 이권이거나 민원인이 내미는 '봉투' 다.

메가와티 집권 후 제일 먼저 제도와 시스템부터 일으켜 세워야 한다는 지적이 학계와 법률계에서 나오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메르쿠부와나 대학의 사디킨 교수는 인도네시아 내 부패의 상징으로 정부예산을 예로 들었다. 그는 "인도네시아 예산은 예산이 아니라 한바탕의 사기판이다. 행정부와 의회가 멋대로 항목을 집어넣고 금액을 불려놓는다. 대통령과 의회가 사이좋게 의논해 '국가차원의 사기행각' 을 벌이는 셈" 이라고 지적했다.

예산이 이 모양이니 정책과 행정이 제대로 될 리 만무하다.

헌법학자인 인도네시아 대학 수와르자 교수는 "당장 헌법부터 뜯어고쳐야 한다" 고 주장한다.

국가반부패위원회 이르마 후타바라트 위원장은 '제로 관용' 을 메가와티에게 주문했다. 그는 "법과 제도의 정비는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이에 앞서 대통령이 먼저 측근과 가족의 잘못을 절대 용납 않는 '제로 관용' 을 천명하고 실천해야 한다" 고 말했다.

자카르타=진세근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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