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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내 마음속의 한일 갈등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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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유대인은 유달리 음악을 사랑하는 민족으로 지난 한 세기 동안 세계적인 연주가와 지휘자를 많이 배출했다.

루빈스타인, 아이작 스턴, 아슈케나지, 또 지난 7월 7일 이스라엘 연례 페스티벌에서 극적으로 바그너의 '니벨룽겐의 반지' 를 지휘한 다니엘 바렌보임도 그렇다.

바렌보임은 페스티벌의 총지휘자로서 바그너의 곡을 정식 프로그램에 넣으려고 투쟁하다 결국은 반대에 굴복했다. 그러나 공식 프로그램이 끝나는 순간 그는 청중에게 "바그너를 연주하게 해달라" 고 요청해 극적인 반전을 시도했다. 그가 믿은 것은 그 페스티벌에 참가한 음악애호가들의 예술에 대한 순수한 열정과 사랑이었다.

대부분의 청중은 박수로 응답했다. 반대와 야유는 그 박수소리에 묻히고 말았다. 이 사건은 바렌보임이 그 자신 유대계이긴 하지만 음악가로서 인정하는 바그너 음악과 유대민족의 반 독일, 반 바그너주의 사이에서 겪었음직한 갈등을 말해주면서 또 한편 편견이나 예술 외적인 이유로 위대한 예술이 외면돼서는 안되고 이제 그의 민족이 바그너 음악을 순수하게 향유할 수 있는 때가 왔다고 믿었다는 것을 시사해준다.

이 사건이 내 마음 속에 의미심장한 파문을 일으킨 이유는 나 자신이 일본과 일본 예술에 대해 품고 있는 갈등과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고대와 현대의 일본 예술의 미와 독창성을 인정한다. 또 일본이 낳은 위대한 영화감독들의 작품, 일본 현대건축가들의 작품을 좋아해 왔다.

특히 동양미술사를 강의하는 나로서 일본을 뺀 동양미술을 강의한다는 것은 비교육적이라고 생각하고 학생들이 보다 객관적으로 일본을 배우도록 지도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문화의 국제적 위상이 높아질수록, 미국 뉴욕에서 일본 음식점이 몇 블록마다 생기고, 세계적 미술관들에 일본관의 위상이 커져갈수록 쓴 맛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일본 여행 중 본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오사카성과 히메지성, 여기저기 한국 발굴 미술품들을 보면 먼저 임진왜란과 일제식민의 치욕과 희생을 상기하며 가슴 아파하는 나를 발견하곤 했다. 이렇듯 나 자신 일본에 관한 한 예술적 가치에 대한 인정과 민족적 원한의 사이에 갈등을 겪어 왔다.

독일은 지난 반세기 동안의 공식적인 사죄, 전범 처리와 히틀러 시대와의 정신적 단절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해 왔고 그 결과 이제 이스라엘이 바그너마저 용서하고 수용할 수 있게끔 도와준 것은 존경스럽기까지 하다. 왜 일본은 독일처럼 노력하지 않는가.

일본의 그런 비인도적 배짱 퉁기기에는 결국 종전 직후 맥아더와 미국이 천황 히로히토와 전범들을 용서해 버렸다는 사실과, 1965년의 한.일우호조약에서 한국이 이미 스스로 일본에 헐값으로 면죄부를 쥐어주고 더 이상 요구할 수 있는 입지를 스스로 포기하고 말았다는 사실이 작용해 왔다고 본다.

독도 영유권 문제에서부터 고대 한.일 관계사의 지속적인 왜곡, 정신대 위안부와 징용 한국인의 보상 거부, 야스쿠니 신사 참배 강행 등을 지켜보는 나의 마음 속에서는 일본 예술과의 갈등이 계속 진행되고 있다.

그렇다. 한국도 일본의 식민압제로부터 해방된 지 벌써 56년이 흘러갔고, 원혼들이 내는 울부짖음도 잦아져가고, 일제시대의 세대가 사라져가고 있어 격세지감을 느낄 일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그러나 지난해 현 정권이 일본과의 공식 문화개방을 선언했을 때 나는 솔직히 거부감과 우려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더욱이 올해 들어 일본은 새 총리 아래 보수주의자들은 극우로 치닫고, 전쟁을 미화하고, 독립민주주의 국가인 현 한국 정부를 무시하는 태도를 취해오고 있었다.

이런 판국에 질질 끌어오던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사건으로 인해 한국 정부가 마침내 일본 문화에 대한 완전 개방, 완전 용서라는 공식적인 명분은 일단 거둬들이는 결단을 내리기로 했다는 보도에 접했다. 착잡하긴 하지만 왠지 안도의 한숨이 나온다. 어쩌면 영원히 해결될 수 없을 나 개인과 일본 예술의 갈등관계, 일본 문화와 한국과 한민족의 관계에 대해 또 다시 깊은 생각에 잠긴다.

김홍남 이화여대 교수·미술사

▶약력=서울대 미학과 졸업, 미국 예일대 MA/Ph. D(동양미술사전공), 미국 메릴랜드 주립대 조교수, 뉴욕 아시아소사이어티 록펠러동양미술컬렉션 학예실장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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