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한·중·일, 주류층이 역사와 인문 바탕으로 시각 평형 이뤄야”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161호 10면

쑤둥버(오른쪽) 쿤넝투자 회장이 지난달 28일 베이징시 시청(西城)구 신성(新盛) 빌딩에 있는 자신의 사무실에서 김명호 교수를 만나 대담을 나누고 있다.

쑤둥버(蘇東波·48) 쿤넝(坤能)투자 회장은 한마디로 정의 내리기가 힘든 사람 같았다. 중앙정부, 지방정부, 기업, 대학, 공익사업, 독립경제학자, 사외이사 등 다양한 경력이 있지만 엄밀히 말하면 정부관료도 기업가도 학자도 아니다. 그러나 많은 정부 관료, 기업가, 학자, 심지어 군인들도 수시로 그를 찾아와 자문을 한다. 현재 문화혁명 후 중국 각계 핵심 요직에 있는 ‘대학입학 1세대’들의 정신적 리더로 통한다.

문혁 후 ‘대학입학 1세대’의 정신적 리더 쑤둥버 쿤넝투자 회장

중국 역사와 국제정세를 꿰뚫어보는 혜안의 소유자라고 말하는 선후배들이 많지만 정작 본인은 하루에 네 시간 이상을 자 본 적이 없고 궁금하면 현장을 찾아가 이해가 될 때까지 머물며 탐구하는 습관 외에 남들과 별다른 것이 없다고 한다.

그는 국내외 역사를 좋아하며 『노자』 『장자』 『손자』를 제일 좋아한다고 한다. 심오한 사상이 깃든 『주역』 『상서』 『황제내경』 등 고전 외에 인문정신이 다분한 종교사상에도 관심이 많다. 불경에 대해서도 라마승이나 중국의 고승들과 좌이논도(坐而論道) 하기를 즐긴다.

쑤둥버 쿤넝투자 회장

그는 문혁이 끝나고 대학입시 제도를 회복한 지 5년째 되던 1981년에 베이징대 경제학과에 들어가 23세에 석사 학위를 딴 뒤 중국경제체제개혁위원회에서 일을 시작했다. 28세에 훈춘시 부시장, 31세에 중국기업 개혁·발전연구회 비서장, 34세에 베이징대 자산관리부 주임을 맡았다. 2002년부터는 주로 농촌 빈곤지역의 현실과 발전전략을 연구해왔다. 또 국내 기관 및 아시아개발은행 등 국제기구의 위탁을 받아 많은 연구프로젝트를 수행했다.

중국 모(某) 민간기업은 그가 사외이사를 맡은 8년 사이에 총자산 규모가 120억 위안(약 2조원)으로 15배가량 늘어났다고 한다. 그가 가진 특유의 인맥과 역할 덕택이라는 평가를 듣는다. 그는 또 모 대형증권사의 사외이사도 맡고 있는 등 중국 금융계에 깊은 인연과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었다.

2002년 40세 생일에 은퇴해 택남(宅男)으로 자처하며 책을 보고 글을 쓰며 신선회(神仙會)를 조직해 ‘2050년의 중국’을 고민했다. 지난해 말부터 다시 하산(下山), 불과 5개월 만에 우리 돈으로 수천억원 규모의 신에너지 펀드를 구성했고 이어서 저탄소 건축펀드, 신생명 펀드 구성에 들어갔다. 그의 말대로라면 신에너지 산업은 현재 지구상에서 제일 큰 공익사업이라고 한다.

어릴 때부터의 좌우명이 ‘도제천하(道濟天下:도로써 천하를 가지런히 한다)’라고 공공연히 이야기하는 그에게 현재 중국 주류계층의 상황, 한반도 문제, 한·중 교류, 동아시아공동체, 신에너지 문제에 대해 들어봤다.

대담은 지난달 28일 오전 10시부터 네 시간 동안 베이징시 시청(西城)구 진룽다제(金融大街) 신성(新盛)빌딩 19층에 있는 쑤둥버의 사무실에서 진행됐다. 다음은 대담 요지.

『장자』『손자』『주역』에 정통한 시장의 허브
▶김명호:예전에 홍콩에 나와 있던 중국 친구가 문화대혁명을 거치며 사회체험을 한 후 대학에 들어가니 시간을 소중하게 여기게 됐다고 하더군요. 한국에서는 문화대혁명이 피해자만 양산했다고 알고 있는데 쑤 선생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쑤둥버:중국은 한국전쟁 이후에야 제1차 5개년 계획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1953년부터 66년까지 격정이 서서히 냉각되면서 안정기에 진입하게 됩니다. 안정기라 함은 하층에 있는 사람들이 위로 올라가기 힘들어지고 위에 있는 사람은 내려가지 않고, 사회가 조용한 물과 같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문혁은 이러한 사회현상을 뒤집어엎은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문혁 기간 중 많은 문제가 발생했지만 부동계층에 대해 새롭게 정의하고 다른 계층 사람들을 이해하게 만들었습니다. 그 어떤 사회 문제나 역사 문제는 특정 상황과 조건하에서 발생합니다. 정확하다는 판단 역시 제한성이 있습니다. 문혁이 끝난 후 대학에 들어와서 중국을 더 많이, 더 깊이, 더 넓게 알았습니다.

▶김:대학입시가 회복됐을 때 대학에 입학한 사람들이 지금 40~60세의 연령이 돼 중국의 주류계층이 되었는데 어떤 변화가 일어났습니까?

▶쑤:77년의 대학입시 회복은 중국 역사의 중요한 이정표 중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그때 많은 혈기왕성한 젊은이들이 방방곡곡에서 사명감과 책임감을 가지고 응시했습니다. 혼란의 심각함을 경험한 뒤라 대학에 돌아오게 된 기회를 아주 소중히 여겼습니다. 교실은 매일 꽉 차고 아침 일찍 학교에 가서 좋은 자리 확보하기에 바빴습니다. 다들 학번과 나이를 뛰어넘어 같이 공부하고 토론의 열기가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이 사람들이 중국 사회의 주류계층을 이룬 뒤에 중국 사회의 변화라고 한다면 지식수준이 높을수록 충돌과 혼란의 방식으로 국내외 문제를 처리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현재 80~90년대에 태어난 젊은 친구들이 40세 이상이 되면 중국 주류계층의 자질이 더 높아지고 세계에 대한 이해가 더 깊고 인류에 대한 책임감도 강해지고 해서 세계는 더 평화롭게 되리라 생각합니다.

77년 대학입시 회복 뒤 베이징대 입학
▶김:쑤 선생은 28세의 젊은 나이에 훈춘시 부시장을 역임했고 34세 때 베이징대 자산관리공사 사장과 방정(Founder)그룹 상무부회장(회장은 베이징대 총장이 겸임)을 맡으셨는데 과정이 궁금합니다. 대학에서 기업을 경영하는 데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쑤:99년 초 베이징대에 다시 돌아와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92년 당시 유엔개발계획(UNDP)에서 ‘두만강하류지역개발’을 제기하는 바람에 중앙정부로부터 지방경험 축적차 훈춘시 부시장으로 내려가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우연히 잡지에서 하버드대 개교 기념일에 졸업생들이 거금을 모교에 기부하는 것을 보고 감명을 받았습니다. 98년 베이징대 설립 100주년 행사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떠올라서 베이징대 5년 기획, 100주년 기념에 어떻게 할지 100년 이후에 무엇을 해야 할지에 대해 모교에 제안서를 제출했었는데 채택돼 인민대회당에서 베이징대 100주년 행사를 했습니다. 경축 행사 이후에 사람들과 함께 지난 100년은 어쩔 수 없었지만 앞으로 100년의 목표를 무엇으로 해야 할지에 대해서 고민하고 토론했습니다.

▶김:베이징대 100주년은 중국 역사에서 아주 의미 있는 행사라고 생각합니다. 1898년부터 1998년까지 중국에는 천지개벽의 변화가 일어났었는데 베이징대 100년의 역사는 중국 역사의 축소판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쑤:1798년부터 2098년까지 동방사회(중국·한국·일본, 나아가서 동방)의 변화는 서구의 300년 역사와 관련시킬 수도 있습니다. 첫 번째 100년이 동서방이 부닥치면서 서막을 열었다면 두 번째 100년은 최고봉에 이르렀습니다. 예를 들면 태평양전쟁 같은 것 말입니다. 동서가 믹스되었던 시기였습니다. 다음의 세 번째 100년은 동서가 정신적인 경지에서 믹스되게 될 것입니다. 외부적인 부분은 점차 침전되면서 내부적인 믹스를 통해 새로운 화합의 모양새를 갖추어가고 인류의 발전에 부합되는 신인류, 신문명, 신정신이 시작될 것입니다. 글로벌적 일체성이 있으면서도 각자의 개성을 유지하리라 믿습니다. 대학에서 기업경영을 하는 문제에 대해 이야기한다면 90년대 이전에 베이징대·칭화대 학생들은 주로 학교 내에 관심이 많았는데 92년 덩샤오핑의 남순강화 이후 전 중국에 하해(下海:공무원이나 지식인이 직장을 그만두고 사업에 뛰어드는 걸 의미함) 바람이 불면서 대학에서도 기업을 경영하기 시작했습니다. 재정이 확충되고 정부의 교육 투자와 사회 각계의 지원이 많아지자 대학은 기업을 경영할 필요성이 떨어지면서 연구형 종합대학의 길로 가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어떻게 하면 세계 일류의 연구형 대학으로 갈지 고민하고 있습니다.

▶김:올해 2월 한국에 처음 다녀오셨다고 하던데 인상이 어땠습니까?

▶쑤:깨끗하고 질서정연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국민수준이 높음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60세 되는 분들은 종적이고 역사적인 시각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40세 안팎의 사람들은 종적이면서도 횡적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젊은 친구들은 횡적이고 평면적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김:중국에 ‘혐한론’이 있듯이 한국 주류계층과 기업계의 적지 않은 사람들은 중국과 합작해서 성공 못한다는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중국의 주류계층들이 한국에 별 관심이 없고 중·한 교류의 일선에 나서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한 것은 아닐까요? 쑤 선생만 하더라도 이제 처음 한국에 다녀오지 않았습니까?

서울·베이징·도쿄대 학점 인정제 도입을
▶쑤:모두들 발전에만 관심이 있다 보니 미국과 유럽만 바라보고 이웃들 간에는 교류가 부족했습니다. 역사적으로 교류가 제일 밀접했으면서도 말입니다. 교류의 본질은 사람과 사람입니다. 사람과 사람의 교류는 마음과 마음의 교류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교역일 뿐입니다. 교역은 분쟁을 불러일으킵니다. 교류는 감정을 가진 것이기에 서로 간에 구동존이(求同存異)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대부분이 교역이지 교류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교류를 하려면 양측 모두 보다 높은 안목과 소양이 있어야 하고 이를 상승, 심화시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회 주류계층 사이의 교류는 전략적 의미가 있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해야 사람들이 화합하고 역사와 인문을 바탕으로 지난 세대들의 정신을 이어받아 종적이고 횡적인 시각의 평형을 이루느냐 하는 것이 목표라고 생각합니다.

▶김:양국은 서로 잘 아는 것 같고 여러 계층 간 교류도 많은 듯하지만 대부분의 교류는 형식적인 것 같습니다. 교역에서부터 교류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쑤:민간 차원의 실질적인 교류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같은 세대 사람들 사이의 교
류를 강화할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20세부터 40세 사이의 젊은 사람들 사이에 말입니다. 예를 들어 한·중·일 3국 사이에 ‘동아시아연합대학’ 프로그램을 운영해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학생들이 서울·베이징·도쿄 등에 가서 공부하고 서로 학점을 인정하게 하면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아주 자연스러운 교류를 통해 오해와 모순이 저절로 해결될 수 있을 겁니다. ‘동아시아 일체화’는 이러한 교육·문화·제도 면에서 세부적인 설계와 진행을 하다 보면 실현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동아시아 신에너지 협력체 구성 기대
▶김:쑤 선생은 ‘동아시아 일체화’에 대한 민간 교류의 촉진작용을 중요시하는 것 같습니다.

▶쑤:주권국가 차원에서의 ‘동아시아 일체화’는 제도적인 제약이 있습니다. 유럽연합(EU)의 형성 과정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유럽연맹의 발단이 된 1956년의 ‘석탄철강공동체’는 주권국가 차원에서 시작된 게 아니라 에너지 같은 전략적인 차원에서 합작이 시작되었습니다. 교류를 먼저 시작했지 교역이 아니었습니다. 한·중·일 3국도 에너지 분야의 협력부터 시작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신에너지(혹은 클린에너지) 분야 말입니다.

▶김:시기가 성숙되었다고 봅니까?

▶쑤:신에너지 분야의 공동협력에 대해 한·중·일 3국은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중국의 개혁·개방 이후, 한국과 일본의 기술·자본·기업이 중국의 발전에 많은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나 전략적 영역, 특히 기술면에서 3국은 상호작용적이고 시스템화된 협력을 하지 못하고 개별 프로젝트로만 협력했습니다. 정보기술(IT) 분야를 예로 든다면 전 세계 최대의 시장과 제조공장이면서도 미국의 컨트롤을 받았고 이윤도 대부분 미국이 가져갔습니다. 신에너지 분야에서도 한·중·일 3국이 IT 분야에서의 교훈을 경험 삼아 전면적이고 유효한 협력을 이룬다면 서로 간의 에너지 병목현상을 해결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동해의 석유분쟁 문제도 어렵지 않게 해결할 수 있을 겁니다. 저희들의 신에너지 펀드 연구보고서에 의하면, 만약 2020년에 중국의 모든 차량이 전기자동차로 대체된다면 중국은 더 이상 석유를 수입할 필요가 없게 됩니다. 한국과 일본도 화석자원이 부족합니다. 한·중·일 3국이 모두 풍력, 태양력, 조력, 원자력 등 신에너지를 발전시킨다면 에너지 문제의 해결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지역의 육지와 해양의 생태환경 개선에도 많은 기여를 할 수 있을 겁니다. 최종 목표는 환경입니다. 신에너지는 철학적인 명제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그동안 동아시아 본연의 세계관에 대해 사고해볼 겨를이 없었습니다. ‘정해야 정할 수 있고 정해야 사색할 수 있다(定才能<9759>,<9759>才能思)’는 것을 알면서도 모든 관심은 기술과 소유였습니다. 정신적인 문제는 생각해볼 겨를이 없었습니다. 마음에서부터 오는 느낌에 대해 우리는 깊이 생각해봐야 합니다. 노력을 통해 인간 본연의 생활패턴으로 돌아가기를 희망합니다. 이 역시 한·중·일 3국이 공동으로 관심을 갖고 사고해야 합니다.

선진국들의 對中 기술봉쇄는 실패할 것
▶김:아직은 한국·일본·미국 등이 기술면에서 중국에 앞서 있지만, 중국에 대한 공포심리가 있어서 기술 이전이나 수출을 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중국은 이런 ‘기술봉쇄’를 어떻게 극복해 나가려 할까요?

▶쑤:중국은 기술면에서 발전된 나라에 비해 몇 년 심지어 몇십 년 떨어져 있습니다. 하지만 세계적인 전쟁이 나지 않는 한 지속적인 투자와 연구개발을 통해 20년, 30년 뒤에는 중국의 기술수준도 많이 높아질 거라고 생각합니다. 발전된 나라들에서 혹시 간과한 점이 있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중국은 전 세계에서 제일 큰 실물경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영국 역사를 돌이켜보면 영국이 가장 거대한 실물경제를 가지고 있을 때 기술수준이 제일 강했습니다. 독일이나 미국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난 몇십 년간의 발전을 통해 발달된 나라들은 기술면에서 우위에 있지만 서서히 실물경제에서 퇴출될 것입니다. 중국 실물경제의 발전과 수요에 따라 세계의 기술 역시 지속적으로 발전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기술은 실물경제를 위해 봉사하는 것이지 실험실에 놓고 남한테 보이려고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관건은 수요가 있느냐입니다. 중국은 적극적으로 신에너지 산업을 발전시키려 하고 있습니다. 이는 전 세계의 신에너지 산업과 기술에 거대한 시장과 이윤을 제공하게 됩니다. 만일 중국에서 유럽의 산업혁명 때보다 더 큰 시장을 제공한다면 전 세계 신에너지 분야의 기업과 과학자들이 왜 중국에 오지 않으려 하겠습니까? 이 때문에 선진국들의 대중국 기술봉쇄는 불가능합니다. 선진국들이 거쳐왔던 오염과 에너지 소비를 통한 발전은 인류에게 바람직한 길이 아닙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14억 인구의 중국 역시 선진국들이 걸었던 것과 같은 길을 간다면 지구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신에너지는 공기와 같습니다. 인류의 공유물이지 상품이 아닙니다. 제가 신에너지 펀드를 조성한 이유도 신에너지 분야가 현 세계에서 제일 큰 공익영역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선진국들은 중국에 기술봉쇄를 해서는 안 될 뿐 아니라 14억 중국이 자연회귀적이고 화합적이고 지속적인 발전의 길로 나아갈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합니다. 만일 한국·일본이 기술로 중국시장을 점령하려 하지 않고 중국의 거대한 시장과 유기적으로 결합한다면 이것이 바로 교류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되면 한·중·일 3국의 신에너지 산업은 공동의 자본·기술·시장으로 형성된 모두의 산업이 되고 아시아의 ‘석탄철강공동체’가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김:한국은 현재 남북통일의 문제에 직면해 있습니다. 적잖은 한국인들이 통일 문제에 별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분위기만 형성되면 아주 강렬하게 나올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중국의 영향도 무시 못합니다. 중국도 분열 시기에는 모든 초점과 이슈들이 통일에 맞춰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한국인들은 남북 문제에 대한 중국의 입장에 관심이 많습니다.

▶쑤:제 개인적인 견해이지만 통일 이후의 한반도가 어떤 포지션을 택하느냐가 관건이라고 생각합니다. 중국을 포함한 주변 나라 모두 통일 후의 한반도에 공격적인 국가가 탄생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한국이 스스로를 공격적인 국가로 생각한다면 발전은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의 입장에서 볼 때 주변국들은 한국이 어떻게 할 수 없는 객관적 존재입니다. 한국이 주동적으로 주변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고민하는 것이 보다 냉정하고 현실적이고 화합적이지 않나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김:쑤 선생과의 교류과정에서 쑤 선생의 깊은 인문적 소양이 저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습니다. 현재 한국에서도 CEO 인문학 과정이 환영을 받고 있는데 중국의 현황은 어떻습니까? 여러 형태의 국학 과정과 공자 과정이 있는 것으로 아는데 이런 현상에는 무슨 배경이라도 있습니까?

▶쑤:세계가 점점 밀접해져서 하나의 지구촌이 되고 있지만 사람들은 점점 더 바빠지고 최단기간 내에 문제들을 해결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어느 문제든지 긴 과정을 거쳐 형성되었기에 단기간 내에 해결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더 많은 문제를 야기합니다.

예를 들면 서예 같은 경우 반드시 많은 시간과 정력을 투입해야 명필이 나올 수 있고, 유럽의 공예품 중 어떤 것들은 뛰어난 예술품입니다. 이 역시 많은 시간과 정력을 투입했기에 가능합니다. 하물며 인간의 인문생활이야 오죽하겠습니까? 하루아침에 될 일이 아닙니다. 중국과 한국, 나아가 한·중·일 3국이 민간 차원의 교류기구를 조직해 동서양, 동아시아, 아태지역의 철학·정치·경제·문화의 문제를 가지고 교류를 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인원은 많지 않게 한 번에 20명 이하로 하면 형식에 그치지도 않고 실질적이고 깊은 교류를 할 수 있겠지요. 중국 속담에 “먼저 친구를 사귀고 다음에 장사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아까 말씀하셨던 것처럼 한국 기업인들 사이에서 중국 사업이 어렵다는 이야기는 없어지고 오히려 중국에서 큰 성공을 거두게 될 겁니다. 저희 펀드에서는 수익의 일부분으로 비영리재단을 만들어 인문학을 매체로 한 동아시아 민간교류를 지원할 계획입니다. 예를 들어 아까 이야기했던 동아시아연합대학 같은 것입니다.

중국 고대, 민족도 국가도 강조하지 않아
▶김:마지막으로 쑤 선생의 인생관이나 세계관에 대해 말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쑤:저는 어릴 때부터 도제천하(道濟天下)를 제 좌우명으로 생각했습니다. 교육을 제대로 받은 첫 세대이지만 다른 사람의 기회를 빼앗은 거나 다름없지요. 이 때문에 더욱 ‘도제천하’가 저의 소임이라는 다짐을 하루에도 몇 번씩 하곤 합니다. 전 세계적으로 중대한 변화가 오는 전환점에서 다른 나라의 같은 세대들도 도제천하의 마음을 갖고 이에 걸맞은 책임의식을 가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도제천하’를 하려면 먼저 ‘도’가 무엇인지 알아야 하고 그 다음 ‘제’가 무엇인지 알고 마지막으로 ‘천하’의 개념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중국 고대에서는 민족을 강조한 적도 국가를 강조한 적도 없습니다. 조대(朝代)만 이야기했습니다. 중국 옛사람들이 이야기하는 천하는 지리 개념이 아닌 인군(人群) 개념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때의 주류 가치관으로서의 천하는 국경이 없는 각 민족군(民族群)의 형성과정 바로 그 자체였습니다. 화이지변(華夷之辨)은 약할 때 생겨난 사상입니다. 사람이 약할 때는 변두리를 설정하게 되고 자신이 소멸될까 봐 무서워하게 되지요.

▶김:오랜 시간 감사합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