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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자연·사람이 제 사진 선생님이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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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서울 인사동 갤러리 북스에 걸린 사진작품 앞에 선 후지모토는 “사진 속 풍광은 사라졌지만 한국인은 ‘쓰임의 아름다움’을 또 다른 곳에 새기고 있을 것으로 믿는다”고 말했다.

그는 일본 사람이지만 태어날 때부터 한국과 인연이 깊었다. 아버지가 그에게 ‘타쿠미’란 이름을 지어주었기 때문이다. 건축을 가업으로 이은 아버지는 조선 민예 연구가 아사카와 타쿠미(1891~1931)를 존경했고, 그 마음을 아들에게 전하고 싶었다고 작명 내력을 이야기했다. 사진작가이자 디자이너인 후지모토 타쿠미(藤本巧·61)는 “내 피 속에 이미 한국 유전자가 심어진 것 같았다”고 털어놨다.

“아사카와 타쿠미는 일제강점기에 조선에 와 민예운동을 벌였던 지한파 학자였죠. 조선 미술을 사랑한 나머지 죽어서도 이 땅에 남고 싶다고 유언해 서울 망우동 공원묘지에 묻혔을 정도였습니다. 제가 열아홉 살에 한국에 건너와 한국 사람들을 찍기 시작한 건 아마도 제 이름 타쿠미에 서린 그의 영혼 덕이 아닌가 싶습니다. 망우동에 있는 그분의 묘소에 찾아가 절을 올리며 이런 마음을 전했습니다.”

19일까지 서울 인사동 갤러리 북스(VOOK’S)에서 열리는 ‘후지모토 타쿠미 사진전-가라비토(한국인)’에는 이런 사연이 숨어있었다. 미감과 쓰임새가 조화된 한국 공예를 책으로 공부한 그는 “처음 카메라를 들고 밟은 부산에서 여물통·솟대·석물 등을 직접 보고 더 큰 감동을 느꼈다”고 회상했다.

“절 입구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초가집이 살갗을 마주하고 숨 쉬는 듯 보였어요. 흙과 짚단 냄새가 구수했죠. 구도를 생각하기도 전에 피사체를 향해 돌진했습니다. 무아지경 속에서 셔터를 누르는 내가 있었죠. 자연과 하나가 된 흙벽, 돌무더기 그리고 사람이 좋았어요. 난 살아있는 아름다움에 짓눌려버렸죠.”

그때부터 40여 년, 100여 차례 한국을 드나들며 오로지 한국 풍광과 사람만 찍었다. 이번 전시에 나온 흑백사진 속에는 우리가 일찌감치 잃어버린 한국 문화의 속살과 정수가 살아있다. 그가 1974년 펴낸 첫 사진집 『한국인』은 당시 한국 사진작가들 사이에서 돌려볼 정도로 자극제가 됐다. 이 책엔 사진 찍는 스님으로 유명한 관조 스님이 범어사에서 머리 깎고 출가하는 모습이 담겨 있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2006년 출간한 한국, 풍토와 사람의 기록』, 2009년 작 『이조 공예』까지 오로지 한국을 주제로만 사진집 8권을 낸 그이지만 “아직 현상하지 못한 필름, 풀지 못한 녹음테이프가 꽤 된다”고 했다.

“디자인이 전공이라 사진은 독학으로 배웠어요. 한국의 자연과 사람이 제 사진 선생이었던 셈입니다. 한국은 제 운명의 땅이죠. 앞으로도 눈을 감을 때까지 한국과 한국인을 찍고 싶습니다.”

후지모토 타쿠미의 사진전은 21~27일 부산 ‘자미원 갤러리’로 이어진다. 42년 전 그를 이끌어준 미술평론가 석도륜씨와도 만날 계획이다. “자갈치 시장의 생명력 넘치던 ‘아지매’들을 다시 보고 싶다”는 그는 사람이든 물건이든 “이 쪽이 더 예쁘다”는 말로 한국에 대한 애정을 표현했다.

글·사진=정재숙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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