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민호 기자의 레저 터치] 새삼 ‘길 위의 인연’ 쓰게 만든 만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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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민호 기자

여행은 인연을 맺는 일이다. 이 흔해 빠진 이치를, 빠듯한 일정에 치여 여태 잊어 먹고 살았다. 하나 이번엔 운이 맞았던 모양이다. 지난주 경주에 내려갔었고, 거기서 귀한 연을 쌓았다.

부지런히 경주 시내를 뒤집고 다니던 지난달 30일. 평소 알고 지내던 문화재청 사람이 경주에 내려와 있다는 얘길 전해 들었다. 고청(古靑) 윤경렬(1916~99) 선생 추모 사업 때문이었다. 고청이라면, 마지막 신라인으로 불리는 경주의 큰어른이다. 고청은 경주 사람들이 아무 생각 없이 신라 유물을 내다 팔던 1950년대 어린이박물관 학교를 지어 문화재의 소중함을 일깨운 위인이다. 고청이 세상을 뜬 지 십 년이 지났고, 이제야 선생을 기리는 작업이 시동을 거는 모양이었다.

그날 저녁, 신라문화원 진병길 원장과 함께 천마총 근처 식당에서 문화재청 사람을 만났다. 식당 이름은 도솔마을. 진 원장은 “경주 문화예술인의 사랑방”이라고 식당을 소개했다. 거기서 한 명을 더 만났다. 김윤근(67) 선생. 고청이 세운 어린이박물관 학교 1기 졸업생으로, 경주에서 고청 추모사업을 이끄는 주인공이다.

다른 일행보다 30분쯤 늦게 도착한 김 선생이 문턱을 넘어서더니 다짜고짜 소리를 질렀다. “아니, 도솔마을에선 당연히 고청주를 마셔야지. 맥주가 뭐야?” 고청주? 그렇지 않아도 벽에 붙은 차림표에서 ‘고청주’란 술을 보고 의아해 하던 참이었다. 고청주만 이상한 게 아니었다. 법명주·여여주·덕봉주 등등 생전 처음 보는 술 이름이 나란히 적혀 있었다. 진 원장이 옆에서 거들었다.

“고청주는 고량주입니다. 생전의 고청 선생이 좋아하던 술이지요. 법명주는 법명 스님이 마시는 음료로 사이다입니다. 나머지도 사람 이름에서 따온 것입니다. 여기에 이름을 올리려면 경주 문화예술인의 동의와 그날 밤 술값을 떠맡는 절차를 통과해야 합니다.”

이번엔 김 선생이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도솔마을 창립 설화(!)를 풀어냈다.

“고청 선생께서 돌아가셨을 때 말이야. 빈소에 어느 곱상한 여인네가 찾아와서는 온갖 궂은 일을 묵묵히 하고 있더라고. 장례를 치른 다음에 그 여인네에게 밥 장사를 하라고 꼬였지. 경주의 주당 다 몰아주겠다 하고 말이야.”

그래서 도솔마을이 생겼고, 세상에서 하나뿐인 술이 생겼고, 경주의 내로라하는 술꾼이 모이는 명소가 생겼고, 숱한 사연과 이야기가 차곡차곡 쟁였다. 그 여인네의 이름도 김 선생이 지어줬다. 무심화(無心花). 남자에게 마음을 주지 않는 꽃이란 뜻이다. 쉰 줄로 보이는 도솔마을 주인은 그 뒤로 본명은 숨긴 채 무심화란 이름으로 밥 짓고 봉사활동하며 혼자 살고 있다.

고청은 ‘옛날 속에서 푸르르다’라는 뜻이다. 천 년을 전해 내려오는 신라의 설화 모양 도솔마을의 사연은 아련하고 시큼했다. 낭만이 사라진 시대, 경주는 고청이 있어 여전히 푸르렀다. 독한 고청주를 넘기며 생전에 고청이 600번이나 올랐다는 경주 남산이 떠올랐다. 경주에서 정말 귀한 연을 맺었다.

손민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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