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詩)가 있는 아침 ] - '아득히 먼 길을 새라 부르다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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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허만하(1932~ ), 「아득히 먼 길을 새라 부르다가」전문

아득한 지평선을 향하여 힘껏 팔매질한 돌이 떨어지기 직전 갑자기 몸을 뒤집어 날개를 펼치고 타오르는 홍시빛 하늘로 솟구쳐 오르는 몸짓을 새라 부르다가

조용히 퍼지는 종소리에 떠밀려 잠이 덜 깬 아침 하늘 환한 언저리에 제자리걸음으로 간신히 떠 있는 한 무리 맑은 지저귐을 새라 부르다가

아득히 먼 별자리 바라보며 남에서 북으로 북에서 남으로 한 해에 한 번 가슴 설레는 먼 길을 건너는 수천 마리 새떼의 부드럽고도 모진 날갯짓을 새라 부르다가, 부르다가.



시인은 날개가 있고 부리가 있는 동물을 새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것은 새라고 부르기로 약속한 기호일 뿐이다. 시인이 새라고 부르고 싶어 하는 것은 떨어지는 돌이다. 떨어지는 줄 알았는데, 갑자기 몸을 뒤집어 날개를 펼치고 솟구쳐 오르는 몸짓이다. 중력의 법칙에 이끌리다가 갑자기 그 중력을 거슬러 올라가는 힘이다. 시는 아직 세상에 생기지 않은 이름을 사물이나 정서에 최초로 붙이는 일이니까.

김기택<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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