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말 안통하는 사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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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TV사극 '왕건' 을 보며 자연스럽게 이는 의문은 "후삼국시대 세 나라 사람들은 얼마나 말이 통했을까" 하는 것이다. 왕건 즉위를 축하하러 고려에 간 견훤의 사신에게는 통역이 딸려 있지 않았을까. 대주낭자는 말이 안통해 더욱 박술희 장군의 애를 끓게 한 것은 아닐까.

학계에서는 그러나 후삼국은 물론 그보다 수백년 전 삼국시대에도 한반도인끼리는 의사소통에 별 지장이 없었다고 본다. 서울대 노태돈 교수(한국고대사)는 "고구려.백제.신라가 서로 왕래할 때 통역을 썼다거나 말이 안통해 사단이 벌어진 기록은 없다" 며 "적어도 삼국시대 후반부엔 의사소통에 별 무리가 없었을 것" 이라고 말했다.

서기 642년 백제에 대야성(합천)을 빼앗긴 후 신라는 김춘추(훗날의 태종무열왕)를 고구려에 파견해 동맹을 시도했다. 김춘추는 협상에 실패하고 고구려에 억류됐다가 간신히 탈출했다. 이 때도 그가 통역을 데리고 갔다거나 능숙한 외국어(고구려어) 덕분에 국경을 넘는 데 성공했다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신라 진평왕의 딸 선화공주를 탐낸 나머지 경주에 잠입해 '선화공주가 밤마다 서동을 안고…' 라는 신라어 노래(서동요)를 퍼뜨렸던 백제인 서동(훗날의 무왕)은 신라어에 능통한 백제인이었을까, 아니면 신라어가 모국어나 다름없던 덕을 톡톡히 보았을 뿐일까.

다수설은 후자 쪽이다. 중국 양나라의 기록에도 '신라의 사신이 왔을 때 백제인이 (중국어)통역을 해주었다' 는 대목이 나온다. 신라어와 거의 같은 말을 쓰던 백제인이 중국어에 서툰 신라 사신을 도왔다는 뜻일 것이다.

이렇게 보면 우리 사회는 적게 잡아 1천5백년 이상을 비록 적대관계일지라도 말만은 통했다. 그러나 요즘은 다른 의미에서 '말이 안통하는' 사회로 변질되고 말았다. 언론 세무조사.대북정책 같은 중대한 현안을 맞아 귀를 닫고 자기 주장만 되풀이하고 있다.

전화로 치면 수화(受話)기능이, e-메일이라면 수신모드가 언제부턴가 사라졌다. 대화가 통하지 않는 가운데 곳곳에서 깃발과 적의(敵意)어린 외침들이 자기들 의도하는 곳으로 대중을 몰아대느라 바쁘다.

14년 전의 오늘을 되돌아보자. 직장마다 거리마다 '말' 들이 만발했고, 그 많은 말들이 신통하게도 속속들이 통했다. 입과 귀가 함께 열려 있었고, 거기에 함박웃음까지 보태졌다. 1987년 6월 29일이었다.

노재현 정치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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