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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끗발’이 떨어진 뒤 황혼 앞에 선 사람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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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호 04면

서울 마포구 서교동에 있는 소극장 산울림이 개관 25주년을 맞았다. 한국 소극장 역사에 기록될 사건이다. 아무리 규모가 작아도 극장 운영은 남는 장사가 아니라는 건 ‘예술경영학’의 정설인데, 외부의 지원 없이 견뎌낸 것은 작은 기적이다. 겨우 100석 안팎의 아담한 극장이지만 이곳이 연극 명소가 된 데는 이 무대를 중심으로 한 스타급 여배우들의 활약 덕도 컸다. 1980~90년대 손숙-박정자-윤석화로 이어지는 ‘3인방’의 모노드라마 등이 크게 히트하면서 소극장 일번지로 자리 잡았다. 이 출연 배우는 물론, 여성 취향의 이야기와 관객 구성으로 산울림은 이른바 ‘여성연극’의 메카로 군림했다.

정재왈의 극장 가는 길 - 산울림 소극장 개관 25주년 기념작 ‘한 번만 더 사랑할 수 있다면’

그동안 세월과 세태가 많이 바뀌어 이제 산울림을 여성연극과 연결시키는 경우는 거의 없게 됐지만 이름값이 퇴색한 것은 아니다. 자기 브랜드를 개발한 민간 기획제작 극장으로 산울림은 거의 독보적인 존재나 다름없다. 아무리 대학로에 소극장이 많다고 하더라도 대부분 대관해서 채우는 임대용 사업자인 걸 감안하면, 예술적 자존심에 목숨을 건 주인의 집념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사람은 연출가 임영웅(74)이다.
산울림의 성장과 고락을 함께한 이 노연출가도 70대 중반에 이르렀다. 물론 여전히 정정하게 활동하는 ‘만년 현역’인데 그간 작품 취향이 많이 달라진 걸까. 지칠 줄 모르는 신작에 대한 집착, 실험적이라 할 만한 도전보다는 자신 주변의 이야기로 눈을 돌렸다. 그가 연출을 맡은 25주년 기념공연 첫 작품 ‘한 번만 더 사랑할 수 있다면’이 그런 판단의 근거였다.

세 남자와 한 여자가 등장하는 이 연극은 오늘날을 사는 70대 남성(노년)들의 자화상이다. 아름다운 황혼 이야기! 이런 기대는 극장에 들어서는 순간 여지없이 깨졌다. 진즉 불 켜진 무대에는 영안실이 마련돼 있고 영정 하나가 관객을 맞는다. 극장에 들어선 관객들은 속수무책으로 그의 죽음을 기리는 문상객이 돼 장례의식에 동참해야 했다.

어떤 절박함이 있어 연출은 이런 의도된 장치를 통해 관객의 참여와 이해를 구하려는 걸까. “걸어 다니는 숨 쉬는 무덤.” 한국 나이로 올해 고희가 된 이 연극의 극작가 윤대성은 오늘날 동세대 노인들이 처한 현실을 이 한마디로 압축해 표현했다.

실제 무대엔 등장하진 않지만, 드라마 전개의 발단이자 매개자인 영정 속 주인공 ‘윤수’는 한때 잘나가던 방송국 드라마 PD였다. 여배우와 염문도 없지 않았으나 앞만 보고 성실하게 바삐 달려온 한국의 전형적인 가장이었다. 불가피한 가족에 대한 소홀함도 그 세대들이 감수해야 할 전형의 한 모습일 터, 윤수도 예외는 아니었다. 한데 그가 말년의 고독을 견디다 못해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연극은 예기치 않은 윤수의 죽음을 계기로 오랜만에 재회하는 세 친구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40대 말 은행지점장으로 ‘끗발’을 날렸던 서우만(이인철)과 각각 방송 작가와 배우로 역시 나름의 ‘한때’가 있었던 나상일(권성덕)과 이영호(이호성)가 그들이다. 과거 고도성장의 역군들이지만 이젠 궁핍과 병, 인기 급락으로 설 자리를 잃은 채 외로움과 싸우는 동병상련의 처지다. 윤수의 죽음은 이들의 불우한 처지를 냉철하게 환기시키며 ‘더 이상 노인들의 세상은 없다’는 걸 웅변한다.

극중 긴장의 출렁임도 없지는 않았다. 오래전 윤수를 두고 떠난 홍나리(손봉숙)의 등장에 정의파인 우만은 까칠하게 반응하고, 상일은 그녀에게 묵은 연정의 감정을 살짝 엿보이기도 한다. 더러 회한과 울분이 격정적으로 표현될 때 우리네 부모님을 보는 심정으로 울컥하기도 했다. 하지만 연극은 “국가가 우리 노인들에게 해준 게 뭐 있어”하는 식으로 강변하진 않았다. 대신 상식적인 선에서 관심을 환기시키며 사회의 한 이면을 잔잔하게 드러냈다. 그래서 공명이 컸는지도 모르겠다.

연극은 기품 있는 여인상을 잃지 않으려는 손봉숙의 중량감 있는 연기로 성비의 불균형이 해소되긴 했다. 하지만 소재의 특성상 남성 역할의 비중이 커 이젠 ‘산울림표 남성연극’이라는 문패를 달아도 괜찮을 것 같다. 5월 2일까지 산울림소극장.


중앙일보 문화부 기자를 거쳐 LG아트센터 기획운영부장과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서울예술단 이사장을 역임했다. 공연예술 전문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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