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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사건 발발 … 52년 지나서야 진상규명·명예회복 착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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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제주도에서 게릴라 토벌에 나섰던 군인들의 노고를 치하하는 이승만 대통령.

1948년 4월 3일 제주도에서 4·3사건이 발발했다. 이 사건은 350명의 무장대가 제주도 내 12개 지서와 우익단체들을 공격하면서 시작되었다. 사건의 발단은 1947년의 3·1절 시위였다. 3·1절 시위는 당시 제주도의 어려운 상황 때문에 발발했다.

일제 패망 이후 제주도는 생필품 확보가 어려웠고, 전염병과 흉년으로 주민들은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었다. 게다가 본토로부터 충분한 보급을 받지 못하고 있었던 미군정의 치안력은 47년 초까지 제주도에 미치지 못했다. 따라서 다른 지역과 달리 제주도에서는 인민위원회의 영향력이 강했고, 46년에 있었던 과도입법의원 대표를 선출하는 과정에서 전국에서 유일하게 인민위원회 관련 인사들이 선출·파견되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3·1절 시위 과정에서 경찰이 군중에게 발포하면서 제주도 내 여론이 악화되었고, 남조선노동당이 중심이 되어 미군정의 통치에 반대하는 각종 시위와 파업을 주도하면서 48년 4·3사건이 일어났던 것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48년 5·10 총선거에서 유일하게 제주도만이 선거를 치르지 못했다. 48년 12월에 유엔에서 통과된 대한민국 정부 승인안을 보면 대한민국 정부의 통치권을 ‘선거가 실시된 지역’에 국한하고 있는데, 제주도 지역은 49년 5월 10일 재선거가 실시될 때까지 대한민국의 통치권에서 벗어난 지역이었다.

그런데 막상 이 사건으로 가장 큰 피해를 본 것은 제주도민들이었다. 사건을 일으킨 남조선노동당의 지도부는 무책임하게 월북했고, 48년 8월 15일 수립된 대한민국 정부는 이를 반란 사건으로 규정하고 대대적인 탄압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특히 토벌대는 무장대의 활동을 봉쇄하기 위해 48년 11월부터 한라산의 중산간에 있는 마을을 없애기 시작했는데, 이 과정에서 억울하게 죽거나 다친 사람도 많았다. 가족 중에 한 명이라도 없는 경우에 도피자 가족으로 분류해 다른 가족을 대신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로 인해 제주도에서는 지금도 한 마을에서 같은 날 제사를 지내는 가족이 적지 않다고 한다. 4·3사건의 진압 과정에서 2만~3만 명이 죽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4·3사건의 진상 파악을 위한 움직임은 민주화와 함께 시작되었고, 2000년에는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을 위한 특별법’이 제정돼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위촉하고 진상조사가 시작됐다. 늦게나마 억울하게 죽은 양민들의 명예회복이 진행되고 있는 것은 다행이며, 이를 통한 피해자와 또 다른 국가 권력의 피해자인 가해자 사이의 ‘화해’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한국현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