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간장선생' 군국주의 일본 고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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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6면

일본 영화 '간장선생' (16일 개봉)은 유쾌한 코미디다. 코미디의 본질이 통렬한 웃음으로 사회의 치부(恥部)를 꼬집는 데 있다면 '간장선생' 은 이같은 코미디의 사회적 기능에 제대로 부합하는 작품이다.

일반적으로 코미디는 과장을 특징으로 한다. 현실에선 있을 법하지 않은 소재와 상상력으로 일상의 사소함을 훌쩍 뛰어넘으며, 그 무기력한 일상에 새로운 활력을 제공하는 매력적인 장르다.

'간장선생' 이 그렇다. '나라야마 부시코' (1983년), '우나기' (97년)로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두 번이나 받은 일본 영화계의 거장 이마무라 쇼헤이(今村昌平.75)가 연출했다는 사실에 주눅 들 필요는 없다.

또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하기 직전 히로시마 인근의 작은 섬마을에서 발생한 간염 파동을 앞세워 파시즘의 광기와 전쟁의 부조리를 비판한 사회성 영화라는 점에 긴장할 이유도 없다.

잘 빚은 술이 위에 부담이 적고 머리도 아프지 않듯 '간장선생' 은 관객을 곤혹스럽게 만들지 않는다. 화면 속에 펼쳐지는 과장된 장면과 행동을 좇아가다 보면 감독의 심중을 어렵지 않게 알게 되는 그런 종류의 영화다.

'간장선생' 은 오히려 '귀여운' 면도 있다. 등장인물의 성격이 그렇다는 뜻에서다. 양복에 중절모, 그리고 나비 넥타이 차림으로 도서 벽지에서 신음하는 병자들을 찾아 발이 닳도록 뛰어다니는 의사 아카기(이모토 아키라)의 모습은 거의 만화에 가깝다.

주변인물들도 크게 다르지 않다. 게이샤였던 엄마의 영향을 받아 절대로 몸을 공짜로 주지 않는 창녀, 술이 없으면 하루도 견디지 못하는 '날나리' 승려, 모르핀에 중독돼 군수창고마저 터는 외과의사, 여자에게 빠져 나랏돈을 횡령하는 철부지 공무원 등.

백전노장의 이마무라 감독은 이들의 우스꽝스런 좌충우돌을 통해 군국주의가 극에 달했던 40년대 중반의 일본사회를 마음껏 조롱한다.

전쟁으로 먹을 것이 달려 국민 대다수가 간염에 걸리는 비참한 상황(영화에서 아카기는 그가 진료한 모든 환자를 간염으로 판정해 돌팔이 의사로 오해받는다)과 국가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내세우는 정치권, 그리고 거기에 호가호위하는 타락한 군부를 대비시키며 인간 존재의 모순, 그리고 시대의 아이러니를 들춰내고 있다.

영화 속에서 포로로 잡힌 미군병사가 그의 머리를 내려치는 일본군에게 이런 말을 한다. "이놈은 머리까지 간염에 걸렸구나. " 가장 비극적인 것은 병에 걸린 육체가 아니라 이성을 잃은 시대에 휩쓸린 민초의 마음이라는 뜻이리라.

마지막에 미군이 투하한 원자폭탄에서 생긴 버섯구름이 창공을 뒤덮는 모습을 바다에서 본 아카기의 말도 걸작이다. "저건 간염에 걸린 큰 간이다. " 일본 역사상 최대의 비극을 가볍게 웃어넘기는 감독의 농익은 인생관이 느껴진다. 98년 부산영화제에서 폐막작으로 소개됐다.

박정호 기자

<노트>

한국사회의 ‘간염’은 무엇일까.또 아카기 같은 의사는 있을까.정치적으로 올바른 일본 영화를 만난 반가움에 앞서 우리 내부의 질환을 직시하자고 말하면 과욕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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