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면 상투, 팔면 바닥…거꾸로 달리는 기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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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외국인을 따르되 기관투자가와는 반대로 행동하라'

요즘 증시에 나도는 말이다. 올 들어 투신권이 대규모 순매수에 나설 때 주가가 상투권에 이른 경우가 한두번이 아니기 때문이다. 외국인들이 주가가 충분히 오른 뒤 매입물량을 털어내면 투신사가 이를 매수해 손해본 경우가 많은 것이다.

기관투자가들은 또 주가 바닥에서 대규모 순매도에 나서 주가가 오를 경우 속수무책으로 바라본 경우도 적지 않았다. 증권 전문가들은 "고객이 간접투자에 넣은 돈을 맡아 관리하는 국내 투신사의 시장예측력이 그만큼 뒤떨어진다는 이야기" 라고 말했다.

◇ 사면 상투, 팔면 바닥?〓증권거래소에 따르면 올 들어 기관 순매매와 종합지수 등락의 상관계수는 0.08로 조사돼 상관관계가 거의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상관계수는 1에 가까우면 정비례, -1에 가까우면 반비례 관계이고 0은 양자 사이에 전혀 관계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비해 외국인의 경우 종합지수와의 상관관계가 0.56에 이른다. 외국인이 사면 주가가 오르고 팔면 지수가 내린 날이 훨씬 많았다는 뜻이다. 지난해부터 기관투자가들의 매매동향은 장세 흐름에 거의 영향을 못 미친 반면 외국인들이 증시를 주도한 것이다.

특히 1주단위로 투신사들의 순매매를 주가지수와 비교해 보면 장세를 앞서 나가기는 커녕 뒷북을 치기 일쑤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지난 1월 투신사들은 4주간 연속 순매도에 나서 7천억원 가까이 팔아치웠으나 주가는 가파르게 상승했다. 상승 물결을 타지 못한 투신사들이 뒤늦게 2월 초부터 순매수로 돌아섰지만 지수는 천장에 닿았다 하락하기 시작했다. 투신사들이 상투를 잡은 셈이다.

거꾸로 3월 말부터 4월 초까지 종합지수가 520선 밑으로 떨어졌을 때 국내 투신사들은 "바닥이 보이지 않는다" 며 순매도에 나섰다. 투신사들은 "증시를 지탱해야 할 기관이 오히려 주가 폭락을 부추기고 있다" 며 투자자들의 눈총을 받았다. 하지만 투신사가 대거 순매도를 한 때가 바로 주가 바닥이었다.

5월 이후 투신사들의 거래 행태는 들쭉날쭉했다. 5월 14일 이후 투신사들은 '대세 상승론' 을 전파하며 4주 연속 순매수를 기록하고 있으나 종합지수는 5월 말의 630선을 꼭지로 조정받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거래소 관계자는 "길게 보아도 올 들어 종합지수가 20%정도 올랐지만 기관은 한달도 빠짐없이 순매도를 기록해 모두 1조9천7백억원어치를 팔아치웠다" 고 지적했다.

◇ 시장 예측력.투명성 높이는 게 우선〓기관이 시장흐름을 주도하지 못하고 뒷북 치는 매매행태에 대해 투신 관계자들은 "자금이 들어오면 사고, 빠져나가면 팔 수밖에 없는 천수답 신세 때문" 이라고 주장한다. 지수가 오른 것을 보고서야 고객들이 수익증권.뮤추얼펀드에 돈을 맡기기 때문에 대세 상승 국면이 아니면 상투를 잡기 일쑤라는 것이다.

투신권은 기업연금제의 도입 등 장기투자를 유도하는 제도적 장치를 도입해야 안정적인 운용을 통해 수익률을 높이는 선순환이 가능하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펀드평가사인 S2F의 박광택 전무는 "시장과 고객을 탓하기에 앞서 펀드에 돈이 들어오지 않는 일차적 책임은 투신사" 라며 "운용의 투명성과 장세 예측력을 키우는 것이 급선무" 라고 지적했다. 시장을 정확히 분석해야 고객의 신뢰를 얻고 장기운용자금을 끌어들일 수 있다는 것이다.

투신사들은 지난 4월 증시가 급등하자 단기간에 10% 이상의 수익률을 목표로 하는 스폿펀드를 앞다퉈 발매했다.

지난 2월에는 시중 자금이 머니마켓펀드(MMF)로 몰리자 약정액을 늘리기 위해 장기채권을 무리하게 편입했다가 금리가 상승하는 바람에 한꺼번에 돈이 빠져나가 홍역을 치렀다. 기관투자가들이 시장 흐름에 뒤쫓아 단타매매에 치중하면서 시장의 불안정성을 확대한 셈이다.

지나치게 잦은 매매로 스스로 수익률을 떨어뜨린다는 지적도 있다. A투신운용 대표는 "미국의 워렌 버핏이 관리하는 펀드는 한 종목을 평균 4백일 가량 보유하는 데 비해 국내 펀드들은 1년에도 3~5차례 종목교체가 이뤄지고 있다" 며 "당장 자금을 유치하기 위한 단기 수익률 확보에 급급하다보니 장기 수익률이 낮아질 수밖에 없다" 고 털어놨다.

나현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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