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장규 칼럼

도망친 죗값, 23조원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5면

대법원이 7명의 대우 임원한테 23조원의 추징금을 물리면서 법적 심판을 일단락지었다. 대우가 부도난 것이 1999년이었으니 5년도 넘게 걸린 셈이다. 어차피 한 푼도 받아낼 수 없는 돈일 테니 추징금의 많고 적음은 별로 뜻이 없다. 대우의 죗값이 그처럼 엄청나다는 것을 돈으로 상징됐을 뿐이다. 김우중 없는 대우에 대한 심판이 무슨 의미가 있겠나.

대법원 확정 판결이 나기 전에 제발 김우중 회장이 귀국하기를 나는 학수고대했었다. 그가 없는 대우 재판은 난센스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끝내 김 회장은 돌아오지 않았고, 따라서 재판도 조연들만 세워 놓고 진행시킨 끝에 도망간 주인공은 그저 '공범'이라는 괄호 안에 집어 넣은 채 법의 형식논리로 봉합하고 말았다.

만약 김 회장이 도망 다니지 않고 일찌감치 귀국했었더라면 사정은 전혀 달라졌을 것이다. 우선 김우중 개인의 명예는 지금쯤에 와서는 상당히 회복되고 어쩌면 주위로부터 동정받을 수 있는 처지가 됐을지도 모른다. 당시 김대중 정권과 무슨 꿍꿍이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내 탓이오"라며 상응하는 죗값을 치렀더라면 윤리적으로 이처럼 비참하게 매도당하고 짓밟히는 신세는 되지 않았을 것이다.

더구나 김 회장이 직접 나서 책임질 것은 책임지고, 신속하게 타개책을 찾아 나갔더라면 대우 도산으로 나라가 지불한 엄청난 경제적 비용은 훨씬 줄었을 것이다. 공식 발표된 대우의 분식회계 규모도 팍 줄었을 것이요, 일파만파로 확산된 경제 악순환 현상도 한결 단기간에 수습됐을 것이다. 공적자금 투입도 당연히 지금보다 크게 줄어드는 것은 물론이고, 자신이 피땀으로 일궈 놓았던 금싸라기 같은 해외시장을 그처럼 허무하게 망쳐 놓지도 않았을 것이다.

물론 누가 뭐래도 김우중은 역사의 한 페이지에 기록될 만한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 한때는 한국 젊은이들이 정치인.기업인을 통틀어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김우중을 꼽을 정도의 영웅이었다. 그는 타고난 비즈니스맨이요, 개척자였다. 지구 끝 어디에든 직접 몸을 던져가며 메이드 인 코리아를 팔았고 값진 시장을 만들어 냈다. 70년대의 드라마 같은 활약상은 물론이고 90년대 중반까지도 세계를 직접 누비고 다녔다. 인도 시장이 한국기업들에 대문을 활짝 열게 한 주인공이 김우중이었고, 폴란드.베트남 등에서 지금도 김우중은 우상이다.

이런 김우중이 도망자 생활을 계속함으로써 그동안 쌓아온 모든 명예와 업적을 스스로 먹칠하고 말았다. 김 회장의 귀국을 기대했던 사람은 나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제아무리 감옥살이가 두렵다 해도 그가 누구인가. 천하의 김우중이 아닌가. 충격이 가시면 좀이 쑤셔서라도 귀국을 결심하리라고 믿었다. 그래서 "책임은 내가 진다. 도매값으로 대우 전체를 매도하지 말라"고 당당히 나서는 모습을 기대했었다. 더구나 모든 것을 자기가 앞장서서 추진했다는 것을 세상이 다 아는데, 애꿎은 부하 7명이 대우의 죗값을 몽땅 뒤집어쓰는 꼴을 계속 모른 척하며 밖으로 전전할 위인이 아니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어떻든 나의 기대는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개인적 실망은 제쳐놓더라도 대우의 역사를, 김우중의 평가를 이런 식으로 마무리 짓자니 너무도 허망하다.

사실 김 회장은 마지막 순간까지 큰소리쳤다. 다른 기업들이 피를 철철 흘리는 구조조정을 펼 때 그는 도리어 과감한 확장정책만이 살길임을 호언장담했었고, 그게 한때는 솔깃하게 먹혀들기도 했다. 김대중 대통령이 가장 신임하는 재계 총수였으니까. 그는 다른 기업들은 엄두도 못 낼 특유의 승부수를 총동원해가며 난관 돌파를 시도했다. 그러나 그는 이미 정상적인 판단력을 상실한 상태였고, 방향 착오를 연발했다. 그런 가운데 대우의 최후는 시간 문제였을 뿐, 필연이었다.

사람들은 그래도 김우중다운 최후의 대단원을 기대했었다.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고 했던 그의 기개를 본받아 제2의 김우중을 꿈꾸던 수많은 한국의 젊은이에게 남긴 최후의 매듭이 고작 '도망자'에 대한 부재자 재판일 것으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도망의 죗값이 23조원이라는 말인가.

이장규 중앙일보 시사미디어 대표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