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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작가 우쭈광 집에선 저우언라이도 문화비평가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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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1950년대 말 우파분자로 몰린 우쭈광, 딩충, 황먀오쯔(왼쪽부터)는 지금의 헤이룽장(黑龍江)성 싼장(三江)평원인 베이다황(北大荒)에 끌려가 3년간 노동을 했다. 1961년 베이징으로 돌아온 세 사람. 김명호 제공


이류당(二流堂)이라는 말은 듣기도 좋고 부르기도 편했다. 기억하기도 좋았다. 전쟁 시절 문화예술인, 학자, 언론인들이 모여 먹고 마시고 마음에 담아 두었던 말들을 편하게 나눌 수 있는 유일한 장소였다. 충칭에 상주하던 저우언라이(周恩來)·둥비우(董必武)·린뱌오(林彪) 등도 자주 얼굴을 내밀었다. 처음에는 공산당의 정책과 정치에 관한 얘기를 하려 했지만 딩충(丁聰)이 “정객(政客)들의 치국(治國) 행위가 정치다. 우리는 정객이 아니다. 소시민들이다”라고 한 다음부터는 혁명이나 정치에 관한 얘기를 입에 올리지 않았다.

저우언라이는 빈손으로 오는 법이 없었다. 항상 옷이나 담요 따위를 들고 왔다. 말이 없던 린뱌오는 가끔 “죽을 끓이면 천하에 별미”라며 공산당 근거지 옌안(延安)에서 수확했다는 대추와 좁쌀을 들고 와 슬그머니 놓고 가곤 했다. 국민당 남방 집행부 주임 왕신헝(王新衡)도 툭하면 황먀오쯔(黃苗子)를 따라 이류당을 찾았다. 공산당 쪽 사람들이 더 붙임성이 있었다. 문화인들은 본인들도 모르는 사이에 서서히 ‘좌경 유치병’ 환자가 되기 시작했다. 딩충은 증세가 특히 심했다.

중·일전쟁이 끝나자 이류당에 모이던 사람들은 충칭을 떠났다. 원래의 생활터전인 상하이와 홍콩 등지로 뿔뿔이 흩어졌다. 차오관화(喬冠華)는 “이류당은 장차 베이징에서 할 일이 많다. 문화인들을 위한 살롱을 만들어 휴식할 장소를 제공해 줄 곳은 이류당밖에 없다”며 미래를 기약했다. 후일 중국의 초대 유엔 대표로 주목을 받았던 ‘백발의 노신사’ 차오관화도 당시에는 이류당에서 날을 지새우던 국제문제 평론가였다.

1949년 신중국이 수립되자 충칭에서 흩어졌던 문화인들이 수도 베이징으로 꾸역꾸역 몰려 들었다. 동작 빠른 연극배우 한 사람이 커다란 서구식 건물을 헐값에 구입해 세를 놓았다. 청자룬이 입주하자 황먀오쯔와 위펑 부부를 필두로 우쭈광(吳組光)과 신펑샤(新鳳霞), 천밍더(陳銘德)와 덩지싱(鄧季惺) 부부도 뒤를 따랐다.

우쭈광은 극작가에 연출가로 명성이 자자했다. 누가 찾아오건 반갑게 대했다. 지척에 연극학원과 영화학원이 있었다. 공연장에나 가야 먼발치에서 볼 수 있었던 미남·미녀들이 항상 집안에 바글바글했다. 우는 장점이 많은 사람 이었다. 평생 “위는 숙이고 아래는 꼿꼿하게 세워라”는 조부의 유언에 충실했다. 자타가 인정하는 거물들과 마주해도 주눅드는 법이 없고 보잘것없다고 여기는 사람들을 만나도 잘난 척 하는 법이 없었다.

작가 라오서(老舍)와 선충원(沈從文), 학생 시절 희곡 한편으로 대가의 반열에 오른 차오위(曺<79BA>), 경극배우 메이란팡(梅蘭芳)과 청옌추(程硯秋), 마오쩌둥의 5대 비서 중 한 사람으로 마오의 도장을 관리하던 톈자잉(田家英), 서화가 치궁(啓功), 치바이스(齊白石), 황융위(黃永玉), 명배우 황쭝잉(黃宗英)의 두 번째 남편인 명 번역가 펑위다이(馮亦代), 천하의 기서(奇書) 『홍루몽(紅樓夢)』을 유려한 영문으로 옮겨놓은 양셴이(楊憲益) 등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상하이 상임부시장 판한녠과 선전부장 샤옌은 회의 참석차 베이징에 올 때마다 제일 먼저 우쭈광의 집을 찾았다. 저우언라이도 이곳에 오면 문화비평가로, 군사위원회 부주석 천이(陳毅)는 군인 정치가가 아닌 시인으로 둔갑했다.

황먀오쯔와 딩충이 왕스샹(王世襄)과 함께 우쭈광의 흉을 본 적이 있었다. 왕스샹은 평생을 놀기만하다 보니 여러 분야에 대가가 된 당대의 기인이었다. 세 사람이 머리를 짜내고 기억을 더듬어도 “먹는 것을 너무 밝히고 많이 먹는 것” 외에는 흠이 없었다. 우쭈광은 후식으로 세숫대야 크기만 한 그릇에 가득 담긴 바바오판(八寶飯)을 먹어 치우는 대식가였다. 게다가 미식가 이기도 했다. 집안에 먹을 것이 떨어지는 날이 없었다.

1954년 봄 베이징에서 문예공작자 회의가 열렸다. 국무원총리 저우언라이가 축사를 했다. 첫마디가 “이류당 사람들 빠짐없이 참석했습니까?”였다. <계속>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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