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60년] 낙동강 혈전 (62) 더 이상 갈 곳이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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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육군 제3사단 15연대 C중대 1소대장인 랠프 반스 중위(왼쪽에 서 있는 사람)가 1951년 3월 23일 의정부 근처에서 중공군 진지를 향해 수류탄을 던지고 있다. 보병 기본 무기인 수류탄은 근접전에서 효과가 커 6·25전쟁 내내 다량으로 사용됐다. [미 국립문서기록보관청]

저 멀리 다부동이 보였다. 민가라고 해봐야 30호 남짓이나 될까 말까 한 한적한 시골 동네였다. 마을 입구를 향해 내가 탄 지프는 전속력으로 달려갔다. 차가 조그만 길로 난 다부동 입구에 들어설 때였다. ‘핑-’ 하면서 날카로운 금속이 스쳐 지나가는 느낌을 받았다.

“으윽….” 운전병이 갑자기 오른팔로 자신의 왼쪽 어깨를 감쌌다. 그리고 차가 급히 멈췄다. 운전병은 핸들을 잡은 채로 겨우 버티고 있었지만 낌새가 이상했다. “무슨 일이냐”면서 내가 운전병을 봤을 때 그의 왼쪽 어깨는 이미 피로 범벅이 돼 있었다. “사단장님, 아이고…맞았는가 봅니다….”

지프 근처에 포탄이 떨어졌던 모양이다. 강한 포탄 파편이 그의 왼쪽 어깨를 날카롭게 찢어냈던 것이다. 피가 심하게 흘러나왔다. 저 멀리 다부동 촌락의 끝은 산자락으로 이어져 있었다. 어쨌든 차를 더 이상 몰기 힘든 상황이었다. 나는 그때 운전을 하지 못했다. 창군(創軍) 뒤에 고급 지휘관들의 차량 사고가 빈번해지자 육군본부에서 “고위 지휘관들은 운전을 직접 하지도 말고, 배우지도 말라”는 엄명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나는 차에서 내리면서 운전병에게 “빨리 위생병에게 가라”고 말한 뒤 급히 뛰었다. 다부동 입구에서 산자락까지 꽤 멀어 보였다. 나는 무조건 달리기 시작했다.

숨이 턱에 닿는 느낌이었다. 최대한 속도를 내서 뛰고 또 뛰었다. 다리에 힘이 빠지고 숨을 더 몰아 쉴 수 없을 정도로 힘이 들었다. 산으로 올라가는 곳이었다. 일단 나는 멈췄다. ‘정말 이렇게 무너지는 것일까….’ 가쁜 숨을 내쉬면서도 나는 그 생각에 계속 매달렸다.

그해 6월 25일 전쟁이 터진 뒤 집에서 뛰쳐나가 무작정 향했던 임진강의 전선, 길고 긴 지연전의 후퇴 끝에 맞았던 낙동강 전투, 다부동을 지키기 위해 쓰러져간 수많은 전우에 대한 생각들이 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내 생각은 나의 어머니를 향했다. 남편을 일찍 여의고 3남매를 키운 어머니다. 어머니는 그저 힘없고 약한 나를 돌봤던 큰 존재였다. 어머니가 나를 이곳에서 또 지켜줄 수 있을까. 그런 믿음 때문이었을까. 나는 어느덧 속으로 ‘어머니, 내게 힘을 주셔야 합니다’라는 간절한 기도를 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나는 하나님께 기도했다. 평양에서 청상과부로 3남매를 키우며 가난에 시달렸던 내 어머니가 간절히 의지했던 종교를 찾았다. “이번의 위기에서 구해주신다면 앞으로 열심히 믿겠습니다.” 어처구니없는 기도였겠지만 나는 하늘에 그런 기도를 올렸다. 솔직히 당시에는 달리 기도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던 것이다. 그저 “이 위기를 벗어나게 해주십시오. 열심히 믿고 따르겠습니다”였다.

가쁜 숨이 가라앉고 마음도 평온해졌다. 산 위를 쳐다봤다. 아군이 밀려 내려오고 있었다. 나는 힘껏 산을 달려 올라갔다. 다시 숨이 가빠지기 시작했다. 중턱에나 이르렀을까. 후퇴하는 선두와 마주쳤다. 1대대장 김재명 소령이 눈에 띄었다. “이리 와라. 모두 이곳에 먼저 앉아라”라고 내가 외쳤다. 김재명 소령은 “너무 굶고 지쳤습니다. 물도 없어서 병사들이 버티기 어려웠습니다”라고 보고했다. 나는 “알았다. 먼저, 모두 여기 앉아라”라고 말했다.

부대 선두가 먼저 자리에 앉자 쫓겨 내려오던 후속 부대원들도 한 곳에 다 모였다. 500~600명쯤 됐다. 일단 저 뒤의 사람까지 모두 앉게 했다. 처절하게 버티다 내려온 부대원들의 지친 모습이 역력했다.

나는 내 마음속에 있는 말들을 모두 꺼냈다. “지금까지 정말 잘 싸웠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물러설 곳이 없다. 여기서 밀린다면 우리는 바다에 빠져야 한다. 저 아래에 미군들이 있다. 우리가 밀리면 저들도 철수한다. 그러면 대한민국은 끝이다. 내가 앞장서겠다. 내가 두려움에 밀려 후퇴하면 너희가 나를 쏴라. 나를 믿고 앞으로 나가서 싸우자.”

저 멀리 하늘과 산이 맞닿은 공제선(空際線)으로 적들이 올라왔다가 다시 우리가 있는 방향으로 내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하나 둘, 점차 그 수가 많아지고 있었다. 나는 옆구리에서 내 권총을 빼 들었다. 나는 적들이 넘어오는 산봉우리를 보면서 앞으로 뛰기 시작했다. 부대원들이 앉아 있는 대열 한가운데를 가르면서 뛰어나갔다.

내가 대열의 가장 앞에 섰다. 그리고 내달리기 시작했다. 부대원들이 따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내 뒤에서 함성이 일고 있었다. 무슨 소리인지는 기억이 없다. 그저 힘찬 부대원들의 외침이 내 뒤를 떠받치고 있었다는 기억뿐이다.

계속 그 산길을 뛰어올랐다. 숨이 다시 찼다. 300m쯤 올랐을까. 누군가 내 어깨를 부여잡았다. 억센 손길이었다. 또 누군가 내 허리를 잡았다. 역시 힘센 손이었다. 나는 더 이상 달려나갈 수가 없었다. 뒤에서 소리가 들렸다. “사단장님, 이제 그만 나오세요. 우리가 앞장서겠습니다.” 내 부하들이 나를 잡아당겼다. 그리고 그들은 쏜살같이 앞으로 나갔다.

백선엽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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