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 포럼] 머리와 가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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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강원도 정선의 주민들이 인공기와 김정일 초상화를 불태우며 시위할 계획이라고 한다. 국군의 정신교육을 맡고 있는 국방일보에 북한을 찬양하는 '피바다' 기사가 실려도, 북한 노동당 간부가 한국신문에 버젓이 글을 써도 눈을 감는 세상에서 감히 김정일 초상화와 인공기를 불사른다고? 어디서 이런 용기가 나왔을까.

*** 가슴만 강조한 통일.외교

현대아산이 북한에 현찰 10억달러를 퍼주는 과정에서 현대건설과 현대전자가 사실상 부도가 나자 정부는 은근히 현대자동차를 끌어 넣으려 했던 모양이다. 현대자동차는 절대 북한에 가지 않겠다고 거부했다.

아니 우리 같은 나라에서 재벌이 권력의 말을 듣지 않는다고? 그런 용기가 어디서 나왔을까. 생존의 이해가 달려 있기 때문이다. 정선 주민들은 금강산 관광에 카지노가 생기면 생계가 끊길 지경이고, 현대자동차는 북한에 돈을 퍼주었다가는 동생 회사처럼 망하게 될 것을 뻔히 알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통일은 두 측면을 지니고 있다. 하나는 가슴으로서 이해되는 통일이고, 다른 하나는 머리로서 이해해야 할 통일이다. 민족분단은 반드시 극복돼야 할 가슴 속의 과제다.

그러나 다른 한편 그 통일이 우리의 생활에 어떤 유익과 편리를 가져다 줄 것이냐 하고 따지는 것도 필수적이다. "통일, 그거 무조건 해야지요" 라고 말하는 사람만 통일세력이 아니라 그 통일이 무슨 통일이며, 어떤 통일을 하려느냐고 머리로 묻는 사람들도 애국자요, 민족을 사랑하는 사람들인 것이다.

지금까지 이 정부는 국민의 가슴만을 겨냥한 통일을 외쳤다. 자유민주주의 통일을 하려는지, 아니면 사회주의나 그 비스름한 통일을 하려는 건지, 몇십년 애써 요 정도 쌓아놓은 것까지 다 털어 먹어도 통일은 해야 하는 지상과제인지, 머리 속으로 따지고 걱정하는 사람은 모두 보수반동이고 반통일세력이 됐다.

외교에서도 마찬가지다. 가슴 속으로부터 민족의 자주(自主)를 싫어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러나 강대국에 둘러싸인 한반도라는 조건은 자주 외에 또다른 요소를 고려하게 한다. 언제부턴가 우리나라는 반미(反美)를 외치면 지식인이고, 민족주의자가 되는 양 하는 풍조가 생겼다. 신문을 들여다 보아도 주한미군과 관련된 사건은 사건의 의미보다 늘 더 크게 부각된다. 그것이 자주라고 믿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냉철하게 미국이 빠진 한반도는 어떻게 될 것인지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우리가 주변강대국 수준의 대국이 되지 못하는 한 힘의 논리에 따라 중국.러시아, 아니 일본이 한반도에서 미국의 역할을 하려 들 것이다.

그 경우 우리는 어떤 나라를 택하겠는가. 그러니까 줄타기 외교를 해야 한다고? 미국사람들도 그렇게 멍청하지는 않다. 벌써 이곳 워싱턴에서는 심해가는 미.중 갈등구조 속에서 한국은 어느 편에 서있는가 하는 질문이 나오기 시작했다. "너희는 누구 편이냐" 라는 물음 속에는 "너희 자세가 그렇게 애매한데 우리가 왜 돈 바쳐, 생명 바쳐 한국에 가 있느냐" 는 소리를 하는 것이다.

외교는 자주라는 가슴 속의 갈망만으로 이뤄질 수 없다. 국가이익이라는 냉철한 머리 속의 계산이 따라야 한다. 국가이익을 위해 친미(親美)가 필요하면 친미를 해야 하는 것이다.

*** 국익 우선한 정책 폈으면

러시아와 중국이 바라는 ABM을 손들어 주는 것은 민족 자존심에 따른 결심이고 미국이 하고자 하는 NMD를 찬성하면 반자주(反自主)가 되는 것이 아니다. 어느 것이 궁극적으로 우리 국가이익이 되느냐만이 중요한 기준인 것이다.

그것은 가슴이 아니라 머리로 결정해야 할 문제다. 외교 역시 이 정부 들어서부터 머리가 아니라 가슴만을 강조하는 목소리밖에 안들린다. 국가이익에 가장 예민해야 할 외무장관조차 "민족의 자존심 때문에 미국 요구를 반대하고… 운운" 하면서 물러나는 것을 보면 이 나라가 정말 머리가 있는 나라인가 하는 의심이 든다.

나는 가슴만을 내세우는 사람은 믿지 않는다. 좋게 보아주면 이상주의.낭만주의라고 할 수 있지만 그것은 궁극적으로 정선 주민이나 현대자동차가 보여주듯 현실적 이해와 부닥칠 때 성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강압적으로 밀고가려는 것은 그것을 내세우는 가슴 속에 우리 머리로는 받아들일 수 없는 또다른 체제를 꿈꾸고 있다는 의심이 들기 때문이다.

문창극 <미주 총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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