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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끔찍한 성적표 받은 날, 슬기로운 위기 탈출 방법 하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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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성적표 받은 날
진 윌리스 글
토니 로스 그림
범경화 옮김
내인생의책
32쪽, 9000원

더 나쁜 결과를 상상하며 마음의 위안을 얻는 것은 흔한 자기 치유 기법이다. 접촉 사고로 망가진 차 수리비를 내며 ‘사람 안 다쳐서 다행’이라 안도하고, 실연을 당한 뒤 ‘결혼하고 헤어진 것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식이다. 실은 ‘눈속임’ 위로인데도, 마음 다스리는 데 제법 쓸모가 있다. 또 이미 벌어진 나쁜 일에서 한 발 떨어져 생각해볼 여유를 만들어 주는 효과도 크다.

책의 주인공인 토끼 플러프가 부모님께 편지를 남겼다. 편지는 “저는 집을 나가요”로 시작된다. ‘지옥의 토끼들’이라고 불리는 새 친구들이랑 쓰레기장에서 살기로 했단다. “아마 엄마는 이제 저를 못 알아보실 거예요”라고도 쓰여 있다. 꼬리를 물들이고, 가죽점퍼도 입고 다니고, 귀고리를 하려고 귀에 구멍도 뚫었다고 했다. 오토바이 앞바퀴를 든 채 돼지우리를 넘기도 했단다. 안전모 따위는 절대 쓰지 않고서다. 이젠 또 싸우러 나갈 거라며, 혹 자기를 다시 못보게 된다면 저 대신 동생에게 뽀뽀를 해달라고도 했다. 편지를 읽는 부모라면 가슴이 덜컹할 이야기들이다.

반전은 이미 책 제목에서 암시됐다. “플러프는 멋진 귀를 가지고 있습니다만, 불행히도 선생님 말씀을 듣는 데는 사용하지 않습니다”란 내용이 적힌 성적표를 받은 날, 플러프는 편지를 쓴 것이다. 두 개의 추신도 덧붙였다. 하나는 “이 편지는 사실이 아니에요. 저는 엄마 아빠께 이 세상에는 제 끔찍한 성적표보다 더 나쁜 일들이 많다는 걸 말씀드리고 싶었어요”였고, 다른 하나는 “화를 다 내셨다면, 할머니집에 오셔서 저를 데려가 주세요”였다.

괘씸하고 맹랑한 거짓말이지만 밉지 않다. 더 나쁜 일을 상상하면서까지 자신이 무너지지 않도록 지키는 힘이 생겼다는 게 기특하다. 좌절과 난관의 연속인 삶을 헤쳐가는 동안, 그 지혜를 순간순간 발휘해주길 바라는 마음이 절로 든다.

이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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