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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비야고, 일본회의, 소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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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일본 히비야(日比谷) 고교의 도쿄대 합격자 수가 지난해 16명에서 올해 36명으로 껑충 뛰었다는 뉴스가 최근 있었다. 30명 이상의 합격자는 1972년 이후 38년 만의 일이란다. 이름하여 히비야의 완전 부활이다.

올해로 개교 132주년을 맞는 히비야는 공립학교로는 최고의 명문고였다. 64년의 도쿄대 합격자 수는 193명에 달했다. 그러던 것이 93년 1명으로 줄었다. 일 정부가 도입한 평준화 정책 때문이었다. 그러나 2001년 공립고 살리기의 일환으로 교육법이 바뀌어 학군제가 폐지되고 권한이 지자체로 대폭 이양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하지만 모든 공립학교가 업그레이드에 성공한 건 아니었다. 법 개정은 길을 뚫어줬을 뿐이었다. 운전을 누가 얼마나 잘하는가는 결국 학교 몫이었다. 히비야고 관계자는 “승부는 결국 학교 간 축적된 힘에 의해 판가름났다”고 분석한다.

일본 정치권을 보자. 민주당 정권은 올 초 “이번 정기국회에서 정부 발의로 외국인 지방참정권 부여 법안을 제출할 것”이라고 호언장담했다. 한국 정부는 철석같이 믿었다. 그런데 최근 갑자기 꼬리를 내렸다. 명분은 “연립여당인 국민신당이 반대하기 때문”이란다. 새삼스럽지도 않은 이 구실을 믿는 이는 없다. 그럼 무엇이 상황을 반전시킨 것일까. 자민당의 중진 가토 고이치 의원은 “일본회의가 움직이면서 모든 게 흐트러졌다”고 귀띔했다.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일본회의는 정·재계, 문화계 등 사회 전반의 우익 인사들을 하나로 묶고 이념적 논리를 제공하는 지하의 극우 사령탑이다. 전국 47개 광역 지자체에 본부를 두고 동네마다 지부가 있다. 일본회의는 올 들어 법안 저지를 위해 전국 네트워크를 가동, 지사·시장·지방의회 의원 1만 명 서명운동을 전개했다고 한다. 이를 여야 국회의원들에게 들이밀며 회유했다. 씁쓸하지만 이게 성공했다. 일본회의가 78년부터 구축한 축적의 힘은 막강했다.

일본 기업을 보자. 일 상장기업들은 이달 말 일제히 2009년도(2009. 4~2010. 3)의 결산을 발표한다. 지난해 이맘때 결과를 보면 참담했다. 소니가 2278억 엔의 영업적자가 났고 파나소닉·도시바 등 거의 모든 기업이 줄줄이 적자였다. 그런데 올해 소니 등 거의 모든 기업이 흑자 전환할 것이라 한다. 고개를 갸웃하게 된다. 그도 그럴 것이 환율은 1년 사이 달러당 101엔(2008년도 평균)에서 90엔(2009년도 평균)이 됐다. 가격경쟁력 면에서 10% 정도 불리해졌다. 최근 2년을 보면 25% 불리해졌다. 게다가 내수 침체로 일 국내시장 규모는 오히려 쪼그라들고 있다. 경제지표는 바닥이다. 한마디로 실적이 좋아질 외적 요인은 찾아볼 수 없다. 그럼에도 이 정도까지 치고 올라온 원동력은 과연 뭘까.

바로 축적된 힘이다. 바꿔 말하면 외부요인이 변하고 새로운 돌파구가 열리면 이 축적된 힘이 무시 못할 신(新)동력으로 변할지 모른다는 것이다. 한국에선 요즘 일본 깎아 내리기가 유행하는 듯하지만, 축적의 힘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다.

김현기 도쿄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