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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내일을 준비하는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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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난세엔 영웅도 많은 법. 그러나 이 위기 상황에서 내일을 준비했던 인물로 중국에서는 리다자오(李大釗·1888~1927), 일본에선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1835~1867), 한국에선 김옥균(金玉均·1851~1894)을 나는 꼽겠다. 20, 30년 차이로 동시대를 치열하게 살며 내일을 준비했던 인물들이다.

일본의 막부시대를 끝내고 근대국가로 이끈 견인차 사카모토 료마. 마오쩌퉁(毛澤東)의 스승이었고 중국형 공산주의를 처음으로 도입하고 창당했던 리다차오. 개국과 신체제를 갈망하며 개화당을 조직하고 갑신정변을 일으켜 사흘간 집권했던 김옥균. 이들 모두가 각기 다른 곳에서, 다른 노선, 다른 방법으로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고 내일을 준비하기 위해 꽃다운 젊음을 바친 사람들이다. 료마는 32세, 리다차오는 39세, 김옥균은 43세에 자객에게 살해되거나 처형된다.

나는 이 셋 중에서 사카모토 료마가 21세기적 가치에 가장 가까운 인물이라고 본다. 작가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郞)의 대작 『료마가 간다』(전 10권·이길진 역·창해)를 보면, 료마는 19세 때 무술을 배우기 위해 에도로 향하는 도중 구로후네를 보고 운명적 결단을 한다. 배를 만든다, 바다를 통해 무역을 한다, 해군을 조직한다. 이후 그는 막부의 해운 전문가인 가쓰가이슈(勝海舟)를 암살하러 갔다가 가쓰의 개국 논리에 감화되어 적극적인 개국만이 부국강병의 길임을 확신하고 이 길로 매진한다. 료마의 매력이다. 국가의 성장동력을 일찌감치 바다에서 찾았다.

료마는 외골수 이론가가 아닌 복합적이고 유연한 개혁론자였다. 그는 존왕파였고 개국파였지만 막부파와 쇄국파를 공박하지 않았고 당시 최대 세력인 사쓰마(薩摩)와 조슈(長州)를 결합해 무혈혁명, 왕정복고로 가는 다이세이봉환(大政奉還)의 길을 연다. 료마는 당대 무술의 고수였지만 자신의 검으로 누굴 죽인 적이 없다. 매사를 평화주의로 풀어 갔다. 그는 칼 대신 ‘만국공법(국제법)’이 세계를 지배한다면서 이 책을 늘 품고 다녔다. 동양인 최초의 글로벌 스탠더드 숭배자였다. 그는 발상의 전환자였다. 당시의 정치인·지식인 모두가 존왕파냐 장군파냐, 개국이냐 쇄국이냐로 양분되어 싸울 때 료마 혼자 일본은 어디로 가야 하며 일본인은 무엇을 먹고 살아야 할까를 제시했다.

사카모토 료마가 일본에서 다시 뜨고 있다. NHK에선 드라마 ‘료마전(傳)’이 인기리에 방영 중이고, 그의 행적을 찾는 여행상품이 잘 팔리고 있다고 한다. 이미 1960년대 시바 료타로의 소설이 요미우리신문에 연재되면서 료마는 국민적 영웅으로 자리 잡았고 80년대 고도 성장기 때도 부활한 적이 있다. 료마가 도요타자동차가 세계적 수모를 겪고 있고 소니·혼다 등 일본의 세계적 브랜드가 움츠러들면서 국가 조락(凋落) 징후를 보이는 오늘의 시점에서 주목받고 있다. 뭔가 추락하는 듯한 불안한 시점에서 현대 일본의 꿈과 변화를 몰고 왔던 영웅 료마를 기리며 재충전을 도모하자는 게 아닌가.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가. 정말 국운이 상승 중인가. 겨울올림픽 5위라 해서 나라 수준이 5위가 된 것인가. 그저 손 놓고 있는데 국운이 상승할 리 있나. 지금 돌아가는 모양새로는 또다시 열강의 각축 속에서 언제 우리의 내일이 어두워질지 전전긍긍이다. 중국은 잠재적 1등 제국의 빛을 어둠 속에 감추고 있다. 도광양회(韜光養晦) 수법이다. 일본이 추락한다지만 우리에겐 너무나 앞선 선진국이다. 그들도 스스로를 되돌아보고 있다.

잘나가는 이웃이 있어야 우리도 잘 될 것이라는 기대는 이미 지난 역사에서 충분히 학습한 낭설이다. 청이 흥할 때 우리 임금은 남한산성 포로가 되었고 료마의 길을 따라 성공한 일본은 조선을 식민지화했다. 경술국치가 100년째다. 그런데도 우리의 지도자들, 우리의 정치인들은 아직도 갑신정변 수준에 머물고 있는 건 아닌지. 누가 국가 백년대계를 준비하고 있나.

권영빈 경기문화재단 대표·전 중앙일보 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