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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 '안락사' 첫 합법화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환자의 죽을 권리를 인정하는 '안락사(安樂死)' 가 세계 최초로 네덜란드에서 합법화됐다.

네덜란드 상원은 10일 안락사가 생명의 존엄성을 훼손할 것이라고 강조하는 가톨릭교회 등의 극렬한 반대 속에 안락사 허용 법안을 표결에 부쳐 찬성 46, 반대 28로 통과시켰다. 이 법안은 베아트릭스 여왕의 재가와 관보 게재 등의 절차가 마무리되는 2주 후에 발효된다.

네덜란드가 안락사를 합법화함에 따라 그동안 비공식적으로 안락사를 묵인해 온 다른 유럽 국가들에서도 안락사 법제화 논쟁이 뜨거워질 전망이다.

현재 스위스.콜롬비아.벨기에는 안락사를 묵인하고 있고 미국의 오리건주는 1996년부터 제한적으로 이를 허용하고 있다.

또 호주 노던주(州)도 96년 안락사 허용법을 만들려 했으나 연방의회가 반대해 무산된 바 있다.

이날 통과된 법안은 ▶환자가 온전한 정신상태에서 스스로의 판단으로 일관되게 요구하고▶환자의 고통이 참을 수 없는 것이며▶합리적인 다른 치료대안이 없다는 세가지 조건이 충족될 경우 의사에게 안락사를 실시할 수 있도록 했다.

또 의사는 ▶최소한 한 명 이상의 동료의사와 상의를 거쳐▶의학적으로 적합한 방식을 택해 안락사를 진행해야 한다.

하지만 의사가 먼저 환자에게 안락사를 제안할 수는 없으며 정신적.육체적인 고통이 심해 자신의 결정을 말하기 어려운 환자는 서면으로 안락사를 요구할 수도 있다. 이같은 안락사 허가절차를 위반한 의사는 처벌받는다.

엘스 보르스트 네덜란드 보건장관은 이날 "국민의 90% 이상이 안락사 법제화에 찬성했다. 죽음보다 더한 고통으로 신음하고 있는 환자의 선택권을 존중한 것" 이라고 정당성을 강조했다.

그러나 상원에 6만통 이상의 항의 서한을 보내는 등 격렬한 반대운동을 벌여온 야당 기독교민주당(CDA)과 네덜란드 가톨릭 교회 등은 "의회가 나치 이후 안락사를 합법화한 최초의 결정을 내렸다. 이는 역사적인 실수로 기록될 것" 이라고 비난했다.

이번 조치로 안락사를 원하는 외국인들이 네덜란드로 몰려들어 '죽음의 여행산업' 이 번창하게 될 것이라는 우려도 제기되고 있다.

비록 새 법안이 "환자와 의사간에 돈독한 관계가 있어야만 안락사를 시행할 수 있다" 고 규정하고는 있지만 죽기 위해 몰려드는 환자들을 막을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환자 네명을 안락사시켜 '죽음의 의사' 로 불리는 호주의 필립 니치케 박사는 지난 7일 네덜란드가 새 법안을 승인하면 네덜란드 선박을 사서 공해상에 안락사 병원을 개원할 계획이라고 밝혀 이목을 끌었다. 그럴 경우 형사처벌을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네덜란드에서는 20여년 전부터 안락사가 은밀하게 행해져 왔으며 의회는 이런 현실을 반영해 93년에 안락사를 제한적으로 허용하는 규정을 마련했다.

매년 4천건 정도의 안락사 문제가 발생하며 지난해 안락사한 2천1백23명 가운데 89%는 말기암환자였다.

조강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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