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체없는 총풍" 뒤집힌 판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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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1997년의 판문점 총격요청 사건에 대한 항소심 재판부의 판결 요지는 이렇다.

'▶총격요청 사건은 관련 피고인들간에 사전 모의가 없었고 대북사업가인 한성기 피고인의 돌출행동이었다▶특정 인사의 당선을 돕기 위해 북측에 조직적으로 총격을 요청한 혐의는 인정되지 않는다▶그러나 피고인들이 당시 여당 후보의 선거운동에 도움이 될 만한 북측 동향을 알아보기 위해 북측 인사들과 접촉했던 점은 유죄다. '

이에 따라 98년 안기부와 검찰이 '국기를 뒤흔든 사건' 으로 규정했던 총격요청 사건에 대해 2심은 검찰의 수사 내용을 부인한 셈이다.

1심은 검찰 수사의 틀을 인정했기 때문에 대법원 판결이 주목된다.

항소심 재판부는 한성기씨 등 피고인 3명이 97년 대선 당시 한나라당 이회창(李會昌)후보의 선거 운동에 도움이 될 만한 북측 동향을 알아보기 위해 베이징(北京)에서 북측 인사와 접촉한 사실은 인정했다. 하지만 무력시위 요청은 한성기씨의 돌출 행동으로 판단했다.

검찰은 "청와대 행정관이던 오정은씨가 대선 이후 자신의 지위가 불안해 李후보의 선거운동을 하다 지지율이 오르지 않자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고 판단, 무력시위 요청을 모의했다" 고 기소했었다. 재판부는 그러나 "吳씨가 베이징행 준비상황을 李후보측에서 지시받거나 보고하려 한 증거가 없다" 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대북사업가 장석중씨 역시 총풍 요청을 통해 얻는 실익이 없고▶피고인들의 모의.준비과정이 지나치게 허술하며▶張씨와 韓씨가 베이징을 찾은 이유가 사업 때문이었다는 점 등을 사전모의가 없었다는 판단의 근거로 제시했다.

재판부는 또 "이들이 범행을 자백한 수사 초기 진술 이후 韓씨의 진술이 일관되지 않고 吳씨와 張씨는 빨리 풀려날 것으로 기대하고 자백했다고 주장하고 있어 이들의 범행 자백 진술을 믿을 수 없다" 고 말했다.

결국 항소심 재판부는 이들 3명에게 유죄 판결을 내리면서도 사실관계에서는 '총풍은 실체 없는 해프닝' 이라는 피고인측 주장을 받아들인 셈이다.

이에 앞서 1심 재판부는 "피고인들이 사전모의를 통해 북측에 총격을 요청한 사실이 인정되며 목적을 달성하지는 못했지만 범행 모의와 실행만으로도 국가안보에 대한 심각한 위협" 이라고 지적했다. 이에 따라 피고인들에게 3~5년씩의 실형을 선고하고 보석상태이던 피고인들을 모두 법정구속했었다.

또 1심 재판부는 吳씨를 사실상 주범으로 단정했으나 항소심 재판부는 독자적으로 무력시위를 요구한 韓씨를 이 사건의 주범으로 판단했다.

이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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