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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전쟁의 시대, 소현세자는 인간의 고독을 보았구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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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소현
김인숙 지음
자음과모음
332쪽, 1만2000원

병자호란에 패한 조선의 왕 인조는 아들 소현세자를 청나라에 볼모로 내준다. 소현세자는 청이 명나라를 멸하고 중원을 평정하는 것을 본 후에야 8년여 볼모 노릇을 청산하고 조선으로 환국한다. 그러나 환국 두 달 만에 ‘학질’로 세상을 떠난다. 소현의 죽음 이후 세자빈과 왕손도 차례차례 제거됐다. 인조가 아들을 독살했다는 소문이 무성했다. 작가는 아비가 아들을 죽였으리라 추정되는 그 정황이 빚어내는 비극과 인간의 고독에 주목한다.

인조는 광해군을 물리치고 왕좌에 올랐다. 반정의 명분은 광해군이 명나라의 은혜를 잊었다는 것. 명나라를 명분으로 권력을 잡은 인조 주변의 세력에게, 청의 볼모로 너무 오랜 세월을 보낸 소현세자는 왕권을 위협하는 존재였다. 소현세자의 고독은 거기에 있었다. 청나라가 적인가, 그를 견제하는 고국의 아버지와 정치세력들이 적인가. 명나라를 치러 나가는 청의 전쟁에 종군하면서 누구에게 칼을 겨눠야 하는가.

‘전쟁의 시대였으나 보다 무서운 것은 정치라는 것을 보았습니다. 전쟁은 오직 죽음을 위해 있지만 정치는 죽음까지 농락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없으면 백성을 어찌 살리겠습니까? 나라를 어찌 번성케 하겠습니까? 굴욕을 참아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게 되겠습니까?’(312쪽)

소설가 김인숙씨는 ‘작가의 말’에서 “『소현』은 내겐 행복한 글쓰기였다”며 “5년 동안 어떤 문장은 수백 번쯤 읽고 수백 번쯤 생각했을 것”이라고 적었다. [중앙포토]

‘임금은 나를 위해 울어주지 않으실 것인가. 정녕 울어주지 않으실 것인가…….’(161쪽)

소현의 대척점에는 청나라의 도르곤이 있다. 그는 아버지 청태조가 죽자 조카를 황제로 세우고 섭정왕이 되어 실권을 휘두른다. 소현과 같은 나이지만 전쟁과 정치에 능한 그는 거침없이 제국을 넓혀간다. 그러나 승리하는 왕에게라고 고독이 없는 건 아니었다. 누구라도 적이 될 수 있는, 피비린내 나는 긴장에서 놓여나지 못하는 것이 또한 최고 권력자의 자리다. 결국 작가는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인간의 본질적 고독을 이야기하는 셈이다.

『소현』은 김인숙의 첫 역사소설이다. 이상문학상·대산문학상 등의 수상 경력에 걸맞게 장편임에도 서릿발 같은 문장이 팽팽한 긴장감을 자아낸다.

‘포가 터지면 언 땅이 우물처럼 파이고, 그 파인 곳으로 시체들이 완전히 찢긴 살 조각이 되어 폭설처럼 떨어졌다. 기왕에 죽으려면 누구나 한 번에 죽기를 바랐으나 누구도 한 번에 죽지는 않았다.’(13쪽)

‘똥구덩이에 파묻힌 것보다도 더 더러운 삶이었으나, 죽는 것이 사는 것보다 더 두려웠으니 살지 않을 수가 없었다.’(222쪽)

오직 살아남기 위해 치욕스런 삶을 살아가는 자들의 몸부림으로 가득한 전쟁의 시대. 잔뜩 당겨놓은 활시위처럼 팽팽한 긴장은 소설 막바지 6쪽을 남겨둔 쯤에서야 스르르 풀린다. 끊어지기 전에 놓아주니 고맙기도 하고, 아쉽기도 하다. 여운이 꽤 오래 가겠다.

이경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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