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詩)가 있는 아침 ] - '산의 얼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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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이덕수(1948~) '산의 얼굴' 부분

만만한 산 하나 짊어지고

천왕봉을 오르다 무거워 팽개쳤다

검은 계곡 아래로 곤두박질치는

산의 굉음으로 딱딱 다그닥닥 놀란 딱따구리들

장터목 부근에서 저희끼리만 사는 딱따구리다

덩달아 달아나던 청설모가 되돌아서서

검은 눈망울을 던진다

산의 울타리에 그어진

보이지 않는 선들은

인책선이 되어

자는 바람을 깨우고

사는 것들은 살아있다고 글썽이는

작은 소요의 덫에 걸렸는가 나는

큰산의 옆구리를 밟아가며

산의 갈비 속으로 깊숙이 들어갔다

(후략)



등반길이 그렇듯이 천왕봉을 오르다 무거워 팽개쳤다는 기발한 은유에 따른 시다. '검은 계곡 아래로 곤두박질치는/산의 굉음으로 딱따구리가 천왕봉을 등에 업고' 저희들끼리 즐겁게 사는 화해와 조화로운 세계가 있다. 우리 삶 또한 이 등반길과 같은 과정이 아닐까.

송수권<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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