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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50]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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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 8 : 소련, 대일참전하여 만주와 북한(경흥) 방면으로 진공개시.

8.10 : 소련군, 웅기 점령.

8.12 : 소련군, 나진, 청진 점령.

8.20 : 소련군(제25군) 사령관 치스챠코프대장, 「조선인민에게」첫 포고(북한 각지에서 반일운동가를 중심으로 「인민위원회」를 조직하여 붉은군대(소련군)에 협력하라). 박헌영 등 「공산당 재건협의회」(재건파) 결성.

8.27 : 소련군사령부 명령으로 「평남건준」해체하고 「평남인민정치위원회」로 개편.

9.21 : 북한지역내에 소련 군표 사용, 소작료 3대 7제 채용 선포(註: 남한의 문헌에는 27일로 되어 있음).
9월중 일자미상 : 김일성일파, 소련군과 함께 입북. 뒤이어 「조선독립동맹(연안파)」 선발대 수명도 입북. 국내(북)파의 대표적 존재 현준혁, 반대파에 의해 암살.

10. 8 : 소련군사령관 주재로 「북조선 5도 인민위원회」각도 대표자회의 개최(75명 참가). 임시연락기구인 「인민위원회」조직하여 위원장에 조만식 선임했으나 본인 거부.

10.10 : 「조선공산당 서북 5도 책임자 및 열성자대회」비공개리에 개막. 동대회에 김일성이 정식으로 나타나 기조연설 「북조선민주기지 창설노선」제시(註: 이 노선은 6.25 때까지 공개하지 않고 실천만 하였으며 이 날을 조선노동당 창당일로 삼고 있다). 미군정장관 아놀드 성명, 「인공」을 정식으로 부인.

10.12 : 북한주둔 소련군 제25군사령관 치스챠코프 대장, 포고문 발표(註:『이제 모든 것이 당신들의 것이니 맡아서 산업부흥에 주력하라』고 재강조). 치스챠코프대장과 참모부장 뺀콥스키중장 공동서명의 성명서 발표(註: 일체 무기를 바칠 것, 정당단체는 등록할 것).

10.29 : 대소련 「영화수입계약」을 체결(註: 소련과 북한간의 최초의 무역계약이었으며, 영화분야라는 점에서 소련의 문화침투정책의 일면을 보여줌).

11.11 : 「조-소문화협회」결성.

12.10 : 「북조선항공협회」창설. 북한주둔 소련군 사령부, 「미곡자유·은행사업에 대한 명령서」 발표.

1946년

1. 3 : 「북조선행정국」 회의, 모스크바 삼상회의결정 지지성명. 「평양학원」개원.

1. 5 : 「평남인민(정치)위원회」전체회의(註: 삼상회의결정이 나온 이래 소련사령부와 김일성파는 조선민주당 조만식 위원장에게도 이를 지지하도록 회유위협했으나, 끝내 이를 거부하여 공산측은 「평남인위」의 명의로 찬동케 하고자 전체회의를 개최했음. 그러나 조만식 위원장을 비롯한 민족진영은 반대, 마침내 위원장을 비롯한 위원들 사퇴를 선언하고 퇴장, 이래로 조만식 조선민주당 위원장은 고려호텔에 감금됨).

1. 6 : 평양에서 대규모의 삼상회의 결정지지 시위대회, 이에 북한 각지에서도 개최.

1. 8 : 모스크바 삼상회의에 관한 4대 정당(한국민주당, 국민
당, 조선인민당, 조선공산당)공동성명 발표.

1.12 : 소련측 대표, 미-소 군예비회담차 서울 향발, 김일성 참석하에 삼상회의 결정 지지 군중대회 개최.

1.15 : 소련군 지시로 「북조선중앙은행」창설.

2. 8 : 소련사령부의 지시에 의해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수립, 위원장 김일성, 부위원장 김두봉, 서기장 강양욱, 위원 23명 선임. 「천도교청우당」결성대회. 당수 김달현, 첫 사업인 삼상회의 결정 지지선언.

2.28 : 소련군사령부, 한글신문 「조선신문」을 창간(편집국장 조기천 : 소련군대위).

4.23 : 압록강 양안에 방치중인 목재정리에 관하여 조-중간에 계약 성립.

5.16 : 「북조선공산당」, 「미-소 공동위 결렬과 관련하여 미측을 비난하는 성명」발표.

8.10 : 제1차 「방소사절단」일행 25명 출발, 북한-소련간 「임시체신 협약」성립.

9.20 : 「북조선무역위원회」를 조직하여 대외무역업무 통일(통제).

9.22 : 평양에서 미군정 정권반대 군중대회 조직.

1947년

2.17 : 「북조선 도 시 군 인민위원회대회」개최(20일까지). 주요 의제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에서 결정한 제법령의 결정 승인, 1947년「인민경제」발전계획에 대한 보고와 결정서, 「북조선인민회의」대의원 선거, 미-소 공동위 속개 요청서 통과, 스탈린에게 보내는 감사문 통과 (註: 인민회의 대의원 후보자 237명은 인민위원 5명에 1명의 비율로 천거된 것임).

4. 5 : 북한주둔 소련군사령관 경질, 코로드코프 중장 취임.

5. 1 : 5. 1절을 기해 그간 평양 청류벽 올라가는 언덕 위에 건립중이던 소련군에 바치는 소위 「해방탑」제막식.

5. 7 : 「민주청년동맹」, 세계민주청년동맹에 가입.

5.22 : 국제직맹에서 「북조선직맹」 가입 승인 통지.

6. 7 : 「북조선직맹」위원장 최경덕, 프라하에서 열리는 국제직맹회의에 참가차 평양 출발.

6.18 : 북한의 각 정당 사회단체들, 미-소 공동위 협의참가에 관한 청원서 및 선언문 제출(참가신청 당 단체 38개)

7. 1 : 미-소공동위, 북한측 청원단체 대표와 평양에서 합동회의(3일간). 전체 인민학교, 「국가졸업시험」실시.

7. 2 : 공동위 미측 대표단, 평양 체류중 브라운소장 조만식 전조민당수와 회견(일자미상).

7. 7 : 공동위 소련측 대표단, 서울향발.

10.20 : 「북조선민청」제7차 중앙위원회, 국제대학생연맹 가입을 결정.

10.21 : 공동위 소련측 대표단, 평양으로 철수.

10.30 : 유엔정치위원회, 한국에 유엔위원단 파견안을 가결(41對 0).

11.12 : 북한의 각 정당 사회단체들에서 『유엔정치위원회의 한국문제 결의를 절대 반대한다』는 담화문을 연이어 발표.

11.14 : 유엔총회, 한국 총선거안을 가결(유엔위원단을 구성, 유엔 감시하 남북한 전역에서1948년 3월까지 총선거 실시. 통일정부 수립후 양군 철퇴 등).

12.18 : 북한과 동북만 해방지구간에 우편물 교환 및 전보연락협정 조인.

1948년

1. 9 : 김일성, 유엔위원단은 북한에 일보도 못들어올 것이라고 언명.

1.12 : 유엔한국위원단, 서울에서 업무 개시. 북한 입경을 소련군사령관에게 요청.

1.15 : 「평양시 민전」, 유엔한국위원단 반대열성자 대회 개최.

1.22 : 유엔한국위원단, 첫 협의대상으로 이승만 김구 김일성 박헌영 등을 지명.

1.23 : 소련측, 유엔한국위원단의 북한 입경 거부 통고.

1.31 : 캘커타(인도)에서 열리는 「동남아청년대회」에 참석차 「북조선민청」대표단 일행 출발(註: 이것이 공산권이외 지역에 북한 대표가 나간 시초였다).

2.26 : 유엔소총회, 「가능한 지역선거(미국 제안)」를 31대 1
로 가결.

3.12 : 유엔한국위원단에서 가능지역 선거안 표결(찬4, 반2, 기권2).

3.14 : 전 북한에서 「남한 단독선거 반대군중 시위대회」 를 개최(총 참가인원 210여만명이라고 발표).

3.16 : 북한-중국 비밀군사협정 체결.

4.12 : 북한주둔 소련군사령관, 남한 대표단의 입북교통 및 안전
보장에 관하여 성명.

4.23 : 「연석회의」제4일회의, 남한 정치정세에 관한 결정서, 전동포에게 보내는 호소문, 남한 단독선거와 단독정부 수립에 대한 반대투쟁안, 미·소 양국에 보내는 철군요청서 등을 채택.

4.28 : 남북 연석회의에서 채택된 「미군정부에 보내는 요청서」를 전달하고자 대표 3명 평양 출발.

5. 7 : 소련측, 남북 연석회의의 양군 철퇴 요청에 대하여 자기들은 미군만 동의한다면 언제나 철퇴할 용의가 있다고 정식회한.

6. 7 : 북한주둔 소련군 축소를 발표, 아울러 사령관도 꼬로드코프 중장에서 미끌로프 소장으로 격하된 것을 보도, 최초로 「국가기술자격심사위원회」설치를 결정.

9.18 : 중국 모택동과 중국군사령관 주덕, 북한의 정권 수립에 즈음하여 축전.

9.20 : 소련정부로부터 소련군 철수를 10월 하반기부터 시작하여 1949년 1월 1일전으로 완료할 것을 통고 받음.

10. 3 : 소련유학생 60명 출발.

10. 7 : 「내각」제 5차회의, 평원선(양덕-천성간), 만포선(개고-고인간). 철도전기화계획, 2개년(1949-50년) 인민경제계획수립, 사업진행상황 토의. 파리에서 열리게 된 유엔 제3차회의에 「인공」(이하 소위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약칭함) 대표로 외무상 박헌영을 파견하기로 하고 유엔사무총장과 불외상에게 참가요청서와 입국사증 청원서를 발송.

10.12 : 북한-소련 수교.

10.13 : 소련으로부터 외교관계 설정(승인)에 관한 서한 도착.

10.15 : 북한-몽골 수교.

10.16 : 「조선최고인민회의」상임위원회, 「조선해방기념상」을 제정. 소련 최고상임위원회, 스티코프를 북한주재 대사로 임명. 북한-폴란드 수교.

10.19 : 소련군 철수 제1진, 평양 출발.

10.21 : 북한-체코슬로바키아 수교.

10.27 : 루마니아-북한간 외교관계 설정.

10.29 : 교통상 주영하를 주소대사 발령.

10.30 : 북한-유고슬라비아 수교.

11. 6 : 「중국동북해방지구」중국인으로부터 김일성에 선물(양곡 150만톤).

11.11 : 북한-헝가리 수교.

11.28 : 북한-불가리아 수교.

12. 4 : 김일성, 「국립예술극장」에서 소련군 철수 환송연, 뒤이어 각종 행사.

12.26 : 북한주둔 소련군, 25일에 철수 완료했다고 발표.

1949년

1.11 : 북한주재 소련대사 스티코프대장, 평양 도착(14일 신임장 제출).

2. 9 : 외무상 박헌영, 유엔에 「人共」가입 요청 타진.

2.22 : 방소대표단(단장 : 김일성) 일행, 모스크바로 향발.

3.17 : 「조-소 경제 및 문화적 협조에 관한 협정」 조인, 총21억1,200만루블의 차관을 약정.

4. 7 : 방소대표단 귀환.

4. 9 : 파리에서 개최되는 평화옹호세계대회에 참석차 한설야 박정애 김창준 향불.

4.19 : 「최고인민회의」제1기 3차회의 개막(5일간) 방소위원단 보고, 지방 「인민위원회 선거」총결, 1949년도 종합예산 등을 결정.

5.17 : 북한-알바니아 수교

7. 1 : 유엔한국위원단, 소련군 철수 감시차 입북을 방송으로 요청(소련측 거부).

7.28 : 유엔한국위원단, 주한미군의 완전철수를 확인.

9. 8 : 중국과 특파원 교환 합의로 「조선중앙통신사」기자 2명 북경 향발.

9.21 : 중국 신화사 기자 정설송 일행 평양 도착.

10. 6 : 중국정권 승인. 외교관계 설정.

10.14 : 박헌영, 유엔 특별정치위원회가 유엔한국위원단의 존속과 그 기능 확대를 결정한 데 대해 유엔 사무총장과 총회의장에게 항의서한 발송.

11. 7 : 북한-동독간 외교관계 수립.

12.22 : 중국주재 초대대사 이주연 임명.

12.25 : 중국-북한간 통상우호협정 체결, 북한-소련간 영사협정 체결.

1950년

1.10 : 내각 직속 「정치 경제학 아카데미」창설안 결정, 애치슨 미국무장관, 미국의 태평양 안전보장선을 「알래스카-일본-오키나와-대만-필리핀」으로 한다고 언명.

1.21 : 북한-중국간 우편물 교환 및 전신전화 연락협정 체결.

1.31 : 북한-월맹간 외교관계 설정 합의.

2.14 : 헝가리주재 대사 권오직 임명.

4. 5 : 체코주재 대사 김응기 임명.

5.10 : 북한-소련 항공사, 여객 우편물수송항공로 개설(평양∼청진, 평양∼함흥, 평양∼블라디보스톡, 평양∼원산간).

6. 7 : 방소예술단 소련순방(허정숙 박길용 신고송 외 100명). 소련군주둔 사령관에 메르콜로프소장 부임.

6.10 : 북한, 「조국전선」대표 3명(이인규 김봉홍 김재창)을 여현에 파견하여 유엔한국위원단 대표와 접촉(유엔한국대표단의 입북 거부).

6.25 : 새벽 4시, 인민군 38선 전역으로부터 불법 남침을 개시.

8.13 : 북한주재 중국대사 예자랑 취임.

8.18 : 폴란드주재 대사 최일, 몽고주재대사 김용진 임명.

9.27 : 북한주재 체코공사 예엘 그르수길 취임. 북한, 인도를 통해 「화평 4조건」제시.

9.28 : 유엔군 서울 수복.

10. 5 : 북한-소련간, 무역인도조건협정 체결

12.24 : 북한주재 폴란드공사 유리우스부르긴 취임.

12.25 : 북한주재 불가리아공사 베뜨꼬프 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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