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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배우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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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9면

한국 배우기

“조선 민족은 자력으로 근대화할 수 없다.” 일본의 계몽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의 망발이다. 그는 일본 화폐 1만 엔권의 주인공이자 사학 게이오기주쿠(慶應義塾) 설립자다. 김옥균·박영효·유길준 등 개화파의 정신적·물질적 후원자이기도 했다. 1884년 갑신정변이 실패하자 ‘탈아론(脫亞論)’을 내세워 정한론(征韓論)의 논리를 제공한다.

“열에 아홉은 흰 옷을 입고, 남자는 모자를 쓴다.” 1901년 미국인 버턴 홈스에 비친 한국의 모습이다. 그는 일본의 침략을 “상투와 담뱃대를 잘랐다”고 빗대어 말했다. 서구에 비친 ‘백의민족’은 흰 옷에, 상투에, 갓 쓰고 담뱃대를 문 단조로움과 느릿함뿐이었다. 해방과 6·25전쟁 와중에 런던 타임스는 “한국 민주주의는 쓰레기통에서 장미가 피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고도 했다.

그러나 1986년 프랑스의 문명비평가 기 소르망은 ‘신국부론’에서 한국의 비약적인 발전에 놀란다. “74개 후진국 중 60위에서 25년 만에 9위로 치솟았다”는 것이다. 그래도 아직은 후진국이란 뉘앙스다.

그런 영국과 일본 신문들이 최근 앞다퉈 한국을 배우자고 한다. 파이낸셜 타임스는 “한국은 더 이상 약자(underdog)가 아니다”는 칼럼을 실었다. “인구는 인도의 20분의 1인데, 영국보다 많은 상품을 수출한다”고 부러워한다. 1960년대 아프리카 사하라 수준에서 이제는 영국을 바짝 뒤쫓고 있다고 했다. 일본경제신문은 사설에서 “한국 기업에서 배우자”고 한술 더 뜬다.

밴쿠버 올림픽이 계기다. 스포츠 세계신기록에 눈부신 경제발전이 오버랩된 것이다. 일본 스포츠계도 “다른 선수들도 김연아의 정신력을 배워라” “근성(根性) 부족과 경기 침체가 ‘노 골드’의 원인이다”며 벌써부터 소치 올림픽을 겨냥한다. 다음 주엔 태릉선수촌도 벤치마킹한다.

자부할 만하지만, 그렇다고 ‘이제는 세계 일류’란 낭만적인 생각은 금물. 참, ‘낭만’은 그 후쿠자와가 프랑스어 로망(roman)을 일본 발음 ‘로망(浪漫)’으로 번역한 것이다. 그는 ‘자유’란 용어도 만들었는데, 한때 자유 대신 ‘천하어면(天下御免)’을 고려했다. 그랬더라면 우리는 자유주의를 천하어면주의라고 했을까.

한국은 아직 영국과 일본에서 배울 게 많다. 그들처럼 ‘정점’을 경험해 보지도 못했다. “끊임없이 갈망하라(stay hungry)!” 최고를 추구하는 스티브 잡스의 성공 모멘텀이다. 우리는 아직 배고프다.

박종권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