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액출자 규제로 7조원 투자차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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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사는 바이오산업이 유망하다고 보고 사내에 생명과학연구소를 설립, 운영해온 지 오래다. 최근 이 사업을 육성하기 위해선 과감한 연구개발과 투자가 필요하다는 판단에 따라 다른 계열사들과 공동 출자해 별도 법인을 만들려고 했다. 자금 마련을 위해서다. 출자규제를 받고 있지만 신기술 사업에 진출하면 출자규제 대상에서 예외로 인정받는다는 이야기도 들은 바 있었다. A사 관계자는 "그러나 예외로 인정받으려면 신기술 제품의 매출액이 회사 총매출액의 50% 이상을 차지해야 가능한 것을 알고 난감한 상황"이라면서 "이제 키우려는 신규사업이 전체 매출액의 절반을 넘는 경우가 과연 있을까"라고 반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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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경제인연합회는 24일 '출자총액규제로 인한 투자 저해 및 경영 애로 사례'보고서를 통해 출자규제가 기업의 신규투자를 가로막고 있다면서 이 같은 사례를 소개했다. 전경련 측은 대기업 계열사 42개사 중 출자규제로 투자에 제약을 받고 있는 기업이 39개사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총자산 5조원이 넘는 13개 민간그룹 329개 계열사 중 42개사에 대한 조사에서다. 전경련은 이들 39개사가 처한 투자 애로 사례는 모두 61건이며, 투자 차질 금액은 7조1200여억원에 달한다고 주장했다.

전경련 이승철 상무는 "13개 그룹 계열사의 13%인 42개사만 조사해도 이처럼 많은 사례가 발견됐다"면서 "전체를 다 조사하거나, 그리고 조사에 응한 기업들도 미운털이 박힐까봐 투자 애로점을 다 밝히지 않은 점을 감안하면 투자 저해 사례는 상상을 초월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 출자규제가 어떻게 투자를 가로막나=전경련에 따르면 출자한도를 초과한 기업들은 아예 신규사업에 진출할 생각을 하지 않고 있다. 순자산의 25% 이상을 다른 기업에 출자하면 안 된다는 출자규제를 초과한 B사는 지난 3년간 신규투자는 단 한 건도 하지 않았다. 지난해 말엔 각 부서에 신규투자는 검토도 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이 회사 측은 "치열한 경쟁으로 이익이 제대로 나지 않아 새로운 유망산업 진출이 절실한 형편인데 출자규제 조항에 발목이 잡혀 있다"고 말했다.

외국과의 합작기업은 출자규제를 받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도 예외를 인정받는 기간이 정해져 있다. D사는 미국계 기업과 합작해 세운 자회사가 매년 꾸준한 흑자를 기록하고 있지만 예외인정 기한인 5년이 거의 끝나간다. 이 회사 측은 "자칫 합작 지분을 외국사에 팔아야 할 상황"이라고 밝혔다. 예외 인정을 받지 않으면 회사 자산을 크게 늘려야 출자규제에 묶이지 않는데, 이게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회사 측은 "외국 합작사가 이런 사실을 알고 헐값에 우리 지분을 먹으려 하고 있다"고 말했다.

◆ 사례는 왜 수집했나=출자규제 유지 등을 핵심으로 한 공정거래법 개정안을 저지하기 위해서다. 재계는 그동안 출자규제는 기업투자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고 주장해 왔다. 그러나 "출자규제는 기업투자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면서 "그런 사례가 있으면 내놓아보라"는 공정위의 공세에 밀리기도 했다. 전경련은 "투자는 기업 비밀이기 때문에 아무도 밝히려 하지 않는다"고 반박했지만 역부족이었다는 판단을 내리고 오래전부터 투자 피해 사례를 조사해 왔다고 밝혔다. 전경련은 "기업 이름은 밝히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이날 자료를 공개했다.

김영욱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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