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언대] 은행수수료 인상 논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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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최근 제일은행이 계좌유지수수료 징수를 선언하고 다른 일부 은행들도 이에 동참할 것을 검토하자 은행수수료를 둘러싼 논란이 다시 일고 있다.

그러나 이는 새삼스런 일이 아니다. 은행수수료의 신설 및 인상 때는 물론이고 수신금리를 내리면서 여신금리를 인하하지 않을 경우에도 볼멘 소리가 나온다.

은행서비스 가격이 오를 때마다 여론의 질타를 받는 것은 지하철이나 의료서비스와 같이 은행을 이용하지 않을 수 없는 일반대중에게 그 가격이 공공요금처럼 인식되기 때문이다. 같은 금융기관이지만 이용자가 제한돼 있는 증권회사에 대한 불만의 강도가 약한 것도 이 때문이다.

사실 은행들은 최근까지만 해도 공공기관에 가까웠다고 할 수 있다. 즉 공익을 사적 이윤추구에 우선하지 않으면 안되었고 그 결과 많은 은행서비스가 무료나 원가 이하의 가격으로 제공됐다. 은행에 대한 기여도와 관계없이 모든 고객에게 차별없이 동등하게 서비스해 왔다. 오히려 기여도가 낮은 서민이나 중소기업을 우대해 왔다.

그러나 은행산업의 자율화와 개방화의 진전과 함께 은행서비스가격에 대한 인식에 있어서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 필요하게 됐다.

은행들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적정자본을 유지해야 하고 이를 위해선 적정 수익성의 확보가 필수적이다. 더이상 무료나 원가 이하로 서비스를 제공하거나 기여도가 낮은 고객에게 보조금을 지급할 수 있는 여유가 없어졌다.

또한 은행산업은 어떤 산업보다 정보화 및 전산분야에 많이 투자해야 한다. 이러한 투자로 혜택을 보는 소비자들에게 적정 수수료를 내도록 하지 않는다면 은행은 투하한 자본을 회수할 수 있는 길이 없어진다.

이 과정에서 새로운 수수료 징수항목 신설이나 가격인상이 있을 수밖에 없고 그 결과 낮은 수수료율에 익숙한 소비자들의 큰 저항에 직면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행들이 서비스에 대해 적정가격체계를 정립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적정 수익성을 유지하는 기반을 영영 구축하지 못할 것이다.

은행수수료를 둘러싼 몸살은 우리만 겪는 게 아니다. 미국의 은행산업도 1980년대 금융산업 구조조정기에 많은 수수료의 신설과 인상으로 강한 반발에 부닥쳤다.

그러나 이를 무릅쓰고 수익성 위주의 경영을 한 결과 미국 은행들은 80년대의 어려움을 이겨내고 부활했다. 미국 은행들의 수수료 수익의 비중이 87년 17%에서 99년에는 39%로, 예대마진도 그 기간 중 3.4%에서 5.2%로 증가한 것은 미국 은행들의 수익구조 및 가격체계가 크게 변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은행의 수익성 제고를 위해 금융서비스에 사각지대가 생기게 하거나 잘 살지 못하는 서민들이 금융서비스를 제대로 받지 못하게 하는 상황을 방치하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모든 국민은 적정 금융서비스를 받을 권리가 있다.

하지만 은행이 그 권리를 충족하는데 따른 부담을 더이상 홀로 질 수는 없다. 소비자와 정부도 일정한 몫의 역할을 해야 한다. 소비자의 경우 창구직원보다 기계를 더 많이 이용하든지, 입출금 거래횟수를 줄이는 등 거래관행을 바꿔 은행의 원가가 많이 발생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또 정부는 은행과 소비자의 노력만으론 부족한 부분을 보충하는 각종 수단을 강구해야 한다.

예컨대 연로층을 위한 금융서비스에 대한 보조금 지급, 공과금 납부 등 정부대행 서비스에 대한 적정액 지급 등이 그것이다. 정부가 과거처럼 스스로 해야 할 역할을 은행에 미루기만 한다면 은행의 적정 수익성 유지는 요원하고 그만큼 금융산업의 구조조정도 늦어질 것이다.

金炳淵 <한국금융연구원 은행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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