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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노래가 찡한 까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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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홈페이지에 오른 글을 읽는데 배경음악으로 '홍하의 골짜기'가 나온다. "정든 이 계곡을 떠나가는 그대의 정다운 그 모습. 다시 한번만 얘기하고픈 목장의 푸른 잔디밭 위." 따라서 흥얼거리다 보니, 나는 어느새 여드름투성이의 고등학교 1학년 시절로 돌아가 학교 음악실에 앉아 있다.

얼마 전에는 또 "저 새벽 이슬 내려 빛나는 언덕은 너와 함께 언약 맺은 내 사랑의 고향"으로 시작되는 '안니 로리'를 그렇게 종일 되풀이해 들었다. 그러다 문득 "저 머나먼 바다 건너서 아무도 모르는 곳에 그리운 내 사랑 보니는 고요히 잠자고 있네"를 부르면 꼭 생각난다며 제 첫사랑 이야기를 해주던 고등학교 때 친구 녀석의 글썽이던 눈망울도 생각난다.

그러고 보니 우리는 왜 전부 미국 민요만 부르며 중.고등학교 시절을 보냈을까 하는 생각이 났다. 하와이 민요인 '알로하 오에'와 흑인영가 '내 고향으로 날 보내주'나 '켄터키 옛집'도 단골 레퍼토리였다. 거기에 웨일스 민요 '아 목동아'까지 보태지면, 내 청소년기의 애창곡들은 대부분 목장과 풀밭이 있고, 떠나가서는 돌아올 줄 모르는 사랑하는 임이 있다.

본능적으로 이끌리는 선율이 하나같이 미국 민요인 것이 참 민망하고 얄궂은 노릇이긴 하다. 미 군정청에서 엮은 음악 교과서가 바탕이 되어서 그랬던 걸까?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 가락만 들으면 무의식적으로 떠오르는 아련한 시절의 애틋한 영상들이 있는 것을. 하기야 우리 노래라 한들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노래 속의 시집 간 누나는 3년이 지나도록 소식도 없고, 비단구두 사 가지고 오신다던 서울 가신 오빠도 여태 소식이 없다. 어린 마음에도 "누나는 과꽃을 좋아했지요. 꽃이 피면 꽃밭에서 아주 살았죠"를 부르면 있지도 않은 누나 생각이 나서 코끝이 시큰했다. "뜸북 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고"를 부르다가도 우수수 떨어지는 단풍잎이 안타까웠다. 중학교 때였던가. 비 오던 오후, 혼자 있던 집에서 창밖을 내다보며 "옛날에 즐거이 지내던 일, 나 언제나 그리워라. 동산에 올라가 함께 놀던 그 옛날의 친구들"을 부르다가 까닭도 모르게 떨어뜨렸던 눈물은 아직도 생생하다.

어머니는 부엌일을 하시다가 "낮에 나온 반달은 하얀 반달은 해님이 쓰다 버린 쪽박인가요"를 즐겨 부르셨다. "꼬부랑 할머니가 물 길러 갈 때 치마 끈에 달랑달랑 매어 줬으면" 할 때는 입 꼬리가 슬쩍 올라가시곤 했다.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의 기억은 늘 혼자 흥얼거리시던 '매기의 추억'의 선율과 함께 남아있다. 한번은 이청준 선생과 친구 분들을 따라 노래방에 간 일이 있다. 반주도 없이 '산타 루치아'를 함께 격정적으로 불렀다. "아름다운 나폴리, 짧았던 행복아! 산타 루치아 산타 루치아!" 이 대목에선 다들 정말 행복한 시절은 다 떠내려간 듯한 표정들이 되었다.

내 윗 세대의 추억 속 레퍼토리와 우리 세대와는 분명 같지가 않다. '안니 로리'나 '홍하의 골짜기'는 그들의 기억 속에 없다. '반달'과 '따오기'는 우리에게 생소하다. 그렇지만 깔린 정서의 무늬는 비슷했다. 하지만 내 자식 세대는 훗날 어떤 노래를 추억하게 될까? 빠르고 경쾌한 템포로 휙휙 지나가는 랩과 댄스 음악들이겠지. 노래에 우열이 있을 리는 없다. 하지만 그 시절 노래들의 안타까운 정서의 무늬와 소중한 정의 물결만은 지금 와서도 값있게 느껴진다. 이런 마음이 아로새겨져 힘들 때 쉬어가는 안식을 주었다. 삶에 잔잔한 위로가 되었다.

차를 타고 가는데 옛 노래가 나온다. 나도 모르게 볼륨을 조금 올렸다. 1절을 가만히 참고 듣던 아들 녀석이 웬 청승이냐는 표정으로 앉았다가 딴청을 하며 볼륨을 슬며시 낮춘다.

정 민 한양대 교수.국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