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 현실감 떨어지는 ‘한국판 네슬레’ 계획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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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농식품부의 설명은 이렇다. 우루과이라운드 협상 타결 이후 정부는 세 차례의 장기대책을 통해 무려 210조원을 투입했다. 그런데 돈을 앞세우다 보니 부작용이 생겼다. 사업 목표는 흐지부지돼 버리고 돈 나눠주는 일 관리하다 끝나버렸다는 것이다. 결국 거금을 쏟아붓고도 농업 경쟁력이 높아지고, 농촌 생활이 좋아졌다는 평가는 나오지 않았다. 농식품부 공무원들조차 지금껏 투입한 돈은 ‘먼저 보는 사람이 임자’라고 할 정도다.

그래서 이번엔 사업 목표부터 명확히 세우고 거기에 돈이 필요하다면 그때마다 예산을 짜 배정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추진 방식도 정부의 일방적인 지원에서 벗어나 민간이 투자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데 주력하겠다고 했다. 백번 옳은 얘기다.

하지만 자세히 뜯어보면 얘기가 달라진다. 현실적인 대책을 세우기 위해 자금계획을 뺐다고 했으면서도, 10년 이내에 달성하겠다는 목표는 오히려 비현실적일 만큼 장밋빛이었다. 농·어가의 30%가 회계장부를 쓰게 만들고, 전체 휘발유 소비량의 10%를 해조류에서 뽑아낸 바이오 에너지로 대체하겠다는 식이다. 하이라이트는 ‘매출 10조원짜리 식품기업 5개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장 장관은 “한국판 네슬레를 만들겠다”고까지 했다.

그런데 세계적인 식·음료 기업인 네슬레의 연 매출액은 120조원이다. 이에 비해 2008년을 기준으로 국내 식품기업 가운데 매출이 1조원을 넘는 곳은 9곳이다. CJ가 3조5000억원으로 가장 많고 나머지는 모두 1조원대다. 가령 매출 1조5000억원짜리 회사가 10년 만에 네슬레의 12분의 1인 10조원 규모로라도 크려면 해마다 20% 넘게 성장해야 한다.

하지만 자회사 합병으로 몸집을 불린 지주회사 CJ를 제외한 나머지 ‘1조원 클럽’ 기업들의 2008년 매출액 증가율은 평균 12%였다. 한 증권사의 식품담당 애널리스트는 “인구가 주는데 식품 산업이 그 정도 성장하려면 가격을 올리거나 수출을 획기적으로 늘리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물론 가격 인상은 정부 스스로도 감당 못할 일이다. 수출도 녹록지 않다. 농식품부 스스로도 2020년의 수출 목표를 300억 달러로 잡았다. 이를 상위 5개사만 나눠가져도 목표 달성이 힘들다. 농식품부는 대책의 방향은 잘 잡았다. 하지만 대통령 취임 기념일에 맞춰 화려한 숫자를 내놓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혔기 때문일까. 농식품부는 자금계획도 없이 탁상행정만 되풀이했다는 비판을 자초하고 말았다.

최현철 경제부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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